<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청계천 다리 여행 1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도읍 한양을 가로질렀던 청계천을 되돌아봅니다. 새롭게 복원된 청계천에 놓여 있는 22개의 다리와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흐르는 살곶이다리엔 우리의 역사가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첫 순서로 상류에 해당하는 청계광장부터 삼일교까지를 살펴 봅니다.

 

 

▲ 청계천엔 서울의 과거와 현재의 풍경이 어우러져 있다.

 

청계천이 우리 역사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홍수 때마다 남산에서, 회현에서, 정릉에서 내려오는 지천은 청계천의 한계를 넘기 일쑤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조선 시대 전기부터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모색됐고 태종과 세종, 영조와 정조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박스 기사 참조).

그럼 과연 청계천의 시작은 어디일까. 복개된 이후 지금은 청계 광장에서 인공적으로 시작되지만 청계천의 시발점 표지판은 북악산 서쪽 자하문(북소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북악산에서 시작된 청계천은 경복궁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계광장에서 시발점까지는 걸어서 넉넉잡아 한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 `청계천 발원지` 표지판. 북악산 자하문 앞쪽에 있다.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풍수지리학` 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과일 가게 `모전교`

청계천 다리 여행은 청계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지금은 시작점 뒤로 스프링 모형의 조형물이 새롭게 들어섰다. 청계광장은 캔들 분수와 2단 폭포, 그리고 조선 8도를 상징하는 팔석담 등으로 구성됐다.

 

▲ 청계광장


청계천에서 만나는 첫 번째 다리는 모전교다.

예전 길모퉁이에 있는 과일 가계를 `모전`이라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근처에 있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다리로 원래는 1412년(태종 12) 종묘 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으로 방축할 때 석교를 만들었는데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다고 한다. 영조 연간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엔 모전교로 기록돼 있다.


 

▲ 청계천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



모전교 아래 서린동 SK 빌딩 앞엔 청계천 상류 다리 중 가장 유명한 광통교가 복원돼 있다. 원래는 좀 더 아래쪽에 있던 다리로 서울에서 큰 다리로 알려져 처음엔 대광통교라고 불렸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다리밟기 놀이를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있던 광통교는 북광통교, 대광통교, 광통교, 대광교 등으로 기록돼 있지만 모두 같은 다리다.

`다리밟기` 성행

광통교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다리를 바치고 있는 굵은 돌들에 얽힌 사연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태종의 불편한 심기가 노골적으로 엿보이는 얘기가 전해진다.

 

▲ 광통교 밑에서 본 모습.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면서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다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태조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태종)이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묘에 사용했던 돌들을 이 다리로 옮겨 놓았다고 하니 강씨에 대한 태종의 미움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엿볼 수 있다.

광통교 주변은 많은 상가들이 있어 지금처럼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다리 인근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했다.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 무늬, 그리고 두손을 합장한 채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은 아직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지금은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앞에 예전 광통교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있다.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앉아서 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 광통교 축소 모형 (신한은행 앞)

 

창고 많던 `장통교`

광통교 아래 광교는 예전 광통교가 있던 지역에 있는 다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신각과 인사동문화권-명동문화권을 연결하는 요충지이지만 원래 있던 광통교가 차량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위쪽으로 옮겨지면서 대신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광교 아래로 벽 한쪽엔 정조반차도가 세라믹 자기타일로 구성돼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 광교


광교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장통교다. 관철동과 장교동을 잇는 다리로 근처에 `장찻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해 `장찻골다리`로 불리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장통교, 혹은 장교라 했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어 장창교(長倉校)라고도 불렸다. 시전상인 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소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여서 늘 사람들로 혼잡했다. 19세기 중인으로 개화에 선각자적 역할을 했던 유대치도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 장통교


장통교 다음 만나는 다리는 삼일교다.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설명답게 현대적인 감각이 외면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1919년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붙여진 삼일로가 인근에 위치해 그 이름을 그대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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