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가족>과 <나의 그리스식 웨딩> 통해 본 그리스의 오늘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에서는 그리스와 유로그룹의 현재 상황을 유명 영화제목에 빗대 ‘My big fat Greek divorce’라 표현했다.(원래 영화 제목은 ‘My big fat Greek wedding’이며 국내에서는 ‘나의 그리스식 웨딩(2002)’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유로존에 남고 싶은 그리스와 긴축 재정안을 포함한 재정개혁을 하지 않으면 유로존을 탈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유로그룹간의 밀고 당기기가 마치 이혼법정에 선 부부 같다는 말이다. 7월 1일 현재 그리스가 3차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최종적으로 거부당한 상황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칼럼 마지막에 이혼을 피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듯하나 과연 이 결혼이 모든 대가를 지불해서까지 유지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며 결국 그리스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내비쳤다.

그리스는 우리로서는 사뭇 낯선 나라다. 아크로폴리스에 나와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사색하기 좋아해 일찍이 민주주의를 꽃핀 나라, 혹은 니코스 카잔차스키 소설에 나오는 조르바처럼 정열적이고 자유로운 디오니소스적인 나라. 올 초 ‘꽃보다 할배’ 팀이 여행을 떠났듯이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대표적인 관광지. 보통 그리스하면 이 정도 상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근데 상투적이지 않은 진짜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루 60유로로 제안된 현금이라도 인출하겠다고 현금 인출기 앞에서 긴 줄 서 있는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나라의 디폴트 상황을 지켜보는 걸까? 사소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를 이해해보고자 그리스 관련한 영화를 골라봤다.

먼저 앞서 거론했던 ‘나의 그리스식 웨딩(My big fat Greek wedding,2002)’은 미국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고수하면서도 미국문화에 녹아든 모습을 코믹스럽게 그려낸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리스의 가부장적인 대가족주의의 실체다. 미국에서 개봉당시 상당한 흥행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해체되는 미국 사회에 나름 복고적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국민의 98%가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 Church)를 믿는 그리스에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가부장적인 문화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딸의 사회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 남자와 애 낳고 사는 필부의 삶을 강요한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미국인 남자가 그리스 여자를 만나면서 그리스 처가에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미국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그리스 가족의 모습이다. 그들 눈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제목처럼 ‘Big fat’, 즉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는, 비교적 안전한 외국인 이민자의 모습일 뿐이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 포스터>

진짜 그리스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영화는 사실 따로 있다. 2013년 개봉한 그리스 영화 ‘은밀한 가족(원제 Miss Violence)’이다. 하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민낯은 아니다. 이 영화는 그리스의 부조리한 상황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이용해 은근하게 까발린다. 가족을 사회라고 읽고 아버지를 사회 지도자로 읽으면 대략 감독의 연출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라는 39세의 젊은 신예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한 살 생일을 맞이한 소녀가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하다말고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그리고 그 가족들, 아빠, 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조카 2명은 여전히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그리스의 중하위층 가정이지만 집 안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가족에겐 비밀이 있을 수 없어’라며 방문을 떼어버리는 위압적인 아버지, 허벅지를 칼로 찔러 피를 낸 후 생리중이어서 가족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짓말하는 열네 살 딸, 어린 딸이 자살한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매일매일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며 무표정한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 이들은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 산다. 하지만 가족의 비극은 점점 실체를 드러낸다.

        <'은밀한 가족' 포스터>

독일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아버지로 인해 성적 폭력에 시달리는 한 가족이 어떻게 침묵하고 동조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지 섬뜩하고 충격적인 영상으로 보여준다. 감독은 아버지의 폭력을 방조한 이 가족이 바로 그리스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한 그리스의 현실은 양육수당으로 드러나는 복지의 그늘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직업은 없지만 대가족을 거느리며 살고 있다. 주 5일 530유로가 보수로 주어지는 일을 잠깐 구했지만 그 일도 오래하진 못한다. 대신 그에게는 아이 한명 당 받을 수 있는 양육 수당이 중요하다. 사회복지사가 집에 방문해서 아이를 한 명 더 양육할 수 있을 정도의 가정인지를 판단하는 장면에서 가족은 모두 긴장한다. 결국 다른 이에게 뒷돈을 주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양육수당을 유지하려고 한다. 물론 자녀를 한 명이라도 더 착취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겠지만 아버지가 자녀의 양육수당 조차 하나의 돈벌이로만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복지에 대한 국민의 도덕적 불감을 알 수 있다.

2013년 실제로 한 그리스인 부부가 8명의 자녀를 14명으로 허위 신고해 매달 2500유로의 양육수당을 타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영화 속 아버지처럼 양육수당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없진 않은 가 보다.

그리스의 포퓰리즘적 복지는 이미 유명한 얘기다.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고 할 정도였다. 평균임금과 최저임금이 대폭 올랐고 의료보험은 전 계층으로 확대됐고 심지어 은퇴 후에도 일할 때 수준의 연금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 복지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었다. 부패한 정권의 일가친척들, 놀고먹는 공무원들이 본인들 잇속을 채우기 위해 과도한 복지정책을 남발했을 뿐이었다. 감독이 그려낸 착취와 폭력의 근원인 아버지는 바로 그리스 정부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악행을 반항하지 않고 따라준 가족 구성원들이 바로 그리스 국민들이다.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감독>

감독은 그리스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리더가 어떤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본인들의 침묵이 결국 가정에 어떠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말하기 위해 다소 충격적인 소재를 다뤘다고 한다. 영화의 원제 ‘Miss Violence’ 의미도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Women are victims of violence’의 의미와 함께 ‘I miss violence’ 누군가는 오히려 폭력을 기대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리스의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강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국민이 모두 현재의 총체적 난국을 자초한 ‘Miss Violence’인 셈이다.

사실상 IMF 채무상환에 실패해 혼란에 빠져든 그리스에 더 위험한 신호는 정부의 정책실패에도 무기력한 그리스 국민들의 모습이다. 젊은 영화감독이 이토록 잔인한 이야기를 꺼내들면서까지 국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리스는 어떤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제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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