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남순이 누나 죽은 것 알아?"

한참을 망설이던 준오가 결국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단순히 답답해서였다. 그가 망설인 것은 단 한가지, 충격으로 말 한마디 않는 그가, 누이의 죽음까지 알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훈의 반응은 차가웠다. 잠시 고개를 움찔했을 뿐 그 외의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태도. 오히려 그런 경훈을 바라보는 상대방이 멍해질 정도였다.

사실 처음 왔을 때부터 계속 입안에서 맴돌던, 그렇게도 망설였던 그 얘기를 '이제 더 이상은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로 꺼냈을 때는 그만큼의 무언가가 나올 것을 기대했던 때문이었다.

준오는 와락 경훈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너네 하나밖에 없는 누나가 죽었단 말이야. 자식아"

하지만 준오의 그런 목소리는 덩그런 감옥 안에만 메아리쳐 돌았을 뿐, 그리고 처음 왔을 때 보았던 늙수그레한 간수의 귀만을 쫑긋하게 했을 뿐, 숙이고 있는 경훈의 고개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한가지 건진 거라면 그나마 경훈이 얘기를 듣고는 있다는 것이었다. 움찔하는 그의 모습에서 느껴진 거였지만 그렇다고 준오의 마음을 덮쳤던 절망이 사라져 버린 건 절대 아니었다.

준오는 사건발생 소식을 처음 접했던 때부터 가졌던 한편의 의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의 느낌일 뿐이었다. 어떤 구체성도, 증거도 없는 그저 애매한 느낌. 준오는 거기엔 익숙해 있었다. 직업 때문이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하는 사건들은 나중에 가면 꼭 그 냄새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준오를 보고 '천생 기자'라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개코'라고 하기도 했다. 덕분에 준오는 몇 가지의 특종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난 가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기도 한 지역의 산업 폐기물 불법 매립 사건이었다. 인근 한 지역의 주민으로부터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섰던 준오는 철저하게 은폐된 현장에서 사흘 밤낮을 꼬박 세운 끝에 구체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고 결국은 그 산업폐기물을 내다버린 대기업체는 물론 관할 경찰서, 관할 군청, 그리고 심지어는 도지사와 도경찰청장까지 그 비리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폭로, 관계자들의 옷을 벗게 했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사건과는 특별히 다른 어떤 것이 그에게 전해오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들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 특별한 느낌을 더해주는 한가지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긴 한낱 준오의 희망이요, 기대사항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그랬으면, 하는.

남순의 임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유산과 죽음은? 어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순에게 그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경훈의 그 끔찍한 살인은 또 뭔가. 친모와 계부를 난자해 죽인. 그는 절대 그럴 위인이 되지 못했다. 물론 어찌어찌 해서 몇 번 사고를 저질렀고 그래서 감방까지 갔다왔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도 필경 그럴만한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큰 비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경훈의 입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파괴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도로는 어디까지 줄을 이어 서 있는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지만 지금 준오가 타고 있는 이쪽 하행선은 차 한대를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극한의 대조. 구정연휴를 마치고 올라오는 귀경 행렬 때문이었다. 저마다 고향에서 노모가 준비해 주었을 쌀과 음식 등을 트렁크에 빼곡이 실어서인지 뒤가 잔뜩 내려앉아 보이는 차안에서 어떤 이들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졸린 눈을 비벼 떠가면서 끝이 없게 늘어서 움직이지 않는 행렬의 앞부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자 아나운서와 많이 들어봄직한 코맹맹이 목소리의 남자가 계속해서 고속도로와 인근 국도의 상황을 알려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반대편엔 듬성듬성 날리는 눈발이 창가를 휙휙 스쳐 지나가는 너머로 하얀색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 마치 신의 손으로 그림을 그려 넣기라도 한 듯 은빛 장식들을 몸에 붙이고, 이제 흔들거리는 것도 지겹다는 듯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직 한겨울의 찬바람과 눈보라를 받아내고 있다. 들판이 지나면 산이 나왔다. 삼 철을 아담한 몸집에 어울리는 아담한 나무들로 채우고 한껏 부드러움을 자랑했을 한국의 동산들. 그 산들도 겨울은 그저 시련인 모양이었다. 품안에서 연초록의 빛을 발했을 나무 군상들은 전부 색깔이 거무튀튀하게 변해 어디가 가지이고 어디가 몸통인지 조차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 위를 가리고 있는 또 다른 하늘, 눈이 있어 다행이었다.

자야 하는데. 고속버스에 오를 때부터 계속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준오는, 언젠가 포기했던 의지를 지금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하나…둘…셋…넷…숫자를 헤아려보았다. 스르르 졸음이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쉰 다섯…쉰 여섯…쉰 일곱, 입안에서 숫자는 계속 헤아려지고 있었지만 준오의 의식은 이미 다른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어제 경훈을 만난 이후 신문사로 향했고, 캡에게 며칠 간의 휴가요청을 다시 했고, 너 갑자기 왜그래, 라는 핀잔을 듣는 둥 마는 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지 벌써 26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단 한숨의 잠도 자지 못한 것이었다. 가끔은, 수면제처럼 마시던 술을 갑자기 멀리한 때문도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냉장고문을 열어 때아닌 맥주를 찾다가 결국 소주병을 꺼내 단숨에 나발 불다시피 한 병을 비웠는데도 그저 눈앞이 흐릿해지기만 할 뿐 의식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준오는 그렇게 몸을 뒤척이다가 아침해를 맞고 말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겁게 늘어지는데 의식은 전혀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대신 그의 감긴 눈꺼풀 안의 어둠 속에는 어른어른 거리는 도깨비불과 함께 며칠전 사건현장에서의 뒤엉킨 피와 살점들, 시퍼런 부엌칼을 들고 서 있는 경훈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는 항상 남순이 있었다.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숨이 막혔다. 그리고 수소가스를 집어넣은 듯 팽창하던 가슴속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결국 준오가 내려와 있는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끌어올려 세상 속으로 다시 온몸을 디밀었을 때야 그것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준오는 이내 노력을 포기했다.

눈발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끝을 흐리는 말소리가 차안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다시 한바탕 또 쏟아지려고 하는 모양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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