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세상> MC와 강사로 잘나가던 영준씨에게 무슨 일이?

 

때로 누군가의 이야기는 무자비할 만큼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갑작스런 비극은 언제나 우리 주변을 맴돈다. 신호등마냥 경고등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현실 속 시련은 왜 예고도 없이 찾아오나. 다시 일어서고 싶어도 또다시 닥쳐올 두려움에 굳어 몸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84년생 영준씨는 젊다면 젊다할 서른을 갓 넘긴 나이다. 누군가는 이십 대보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된 홀로서기를 꿈꾸며, 또 누군가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는 나이. 그러나 영준씨에게 더 이상 나이는, 그의 젊음은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영준씨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환경미화원 일을 하셨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다 돌아와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을 때면 언성 높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시작됐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벌어 오신 돈으로 또 술을 사드셨다.

고등학생 즈음엔 어머니를 아버지로부터 보호할 힘이 생겼다. 아버지를 피해 다른 집으로 몇 번 옮겨 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어머니가 울음소리를 그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2년 전부터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치료차 홍계동에 있는 센터에 계신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당신을 웃게 해드리고 싶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야 더 안정적인 곳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고, 척추관협착증이 있는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쉬실 수 있다.

4년제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전문대학원조차도 진학할 여력은 없었다. 혼자서 유투브같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무료 동영상으로 웃음치료나 자기계발을 배웠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일일 행사 MC는 점점 호응이 붙어 불러주는 곳도 많아졌다. 정체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활동범위는 점차 넓어져 유치원, 돌잔치 등 다양한 행사를 나가거나 간간히 강사활동도 다니곤 했다.

이후에는 한 대학의 연극동아리에 들어가 공연도 지도해 완성시켰다. 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드리면 어머니는 대견하다는 듯 행복한 웃음꽃을 피셨다. 그렇게 두 모자의 가정은 사람들 속에서 다시 빛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다 2008년 고열을 동반한 갑작스런 병세와 함께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병명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마르팡증후군. 뇌내출혈 진단을 받고 흉부외과, 신경외과, 개흉술 등 무려 여섯 차례나 수술을 거쳤다. 수술을 거쳤지만 완치는 불가하다. 그래도 조심하며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보려고 노력했다. 중단했던 MC일도 간헐적으로나마 다시 재개했다. 이 병이란 게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듣고 이해할 순 있어도 자기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 말을 할 수 없게 된단다. 병세가 악화되더라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전까진 최대한 꿈에 가까이라도 다가간 뒤 포기하고 싶었다. 아니,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온 몸에 고통이 느껴져도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게 늘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드라이를 하고 나서야 행사장에 나섰다.

그러나 꿈을 위해 살던 영준씨의 노력에 한계가 왔다. 올해 7월 12일 고열 때문에 구로고려대학교 대학병원 응급실에 내원했다. 병세가 너무 악화돼서 대화라곤 “네” “감사합니다” 정도의 단답형만 가능했다. 게다가 어제 봤던 사람의 얼굴을 오늘은 기억할 수 없다. 병세가 정신과 뇌 활동에까지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그럼에도 단 한 명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만큼은 선명하다.

정밀검사 결과 뇌내출혈 재발 및 중추신경계 감염 진단을 받았다. 병원도 여러 번 옮겼다. 작은 후유증이겠지 싶어 작은 병원에서, 동네 큰 병원으로, 거기서도 해결할 수 없어 삼성병원 신경과로 내원했다가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구로고려대학병원 외과에 오게 된 것이다. 치료를 위해 37일간 병원에 누워있으니 오히려 아무생각이 없어졌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모시고 잘할 수 있는, 사랑하는 일을 해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는데…. 어머니는 지난해까지 주 2회에 4시간 단위로 일용직 가사도우미로 활동해왔다. 그러나 영준씨가 요양하게 되면서 간병을 위해 일을 중단한 상태다. 이들 모자는 2009년 수급자로 선정되어 입원진료비는 민간재단의 지원을 통해 마련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재활치료비(재활전문병원 치료비, 본원 외래검사 및 치료비)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절박한 상황이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희망을 빼앗긴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억장이 찢어질 것만 같다. 대동맥을 박리하고 인조혈관을 달았다. 심장판막도 인공판막으로 교체했다. 평생을 항응고제를 복용하며 계속 발생할 수 있는 뇌출혈도 조심해야 한다. 신체의 절반이 마비돼 거동도 할 수 없다. 식사도 앉아서 할 수 없어 누워서 먹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의료진은 영준씨가 아직 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재활치료에 임한다면 긍정적인 예후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직업 활동도 재개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사실 영준씨는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그냥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웃게 해드리고 싶을 뿐이다. 행여나 자신이 아픈 것보다 어머니 마음이 더 아플까, 아파도 아픈 것을 얘기하지 않는다며 의료진과 어머니가 걱정하셨다. 담당간호사 말에 따르면 워낙 쾌활하고 밝게 지내고자 노력하는 영준씨는 입원초기만 해도 의료진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와 밝게 인사했다. 또 사회에서의 경험 덕으로 크리스마스 행사 때는 환우분들을 위해 병원 내 크리스마스 장식 꾸미는 것도 돕고 행사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단다.

그러나 애시당초 완치가 불가한 희귀병이니만큼 증세가 좋아지다가도 다시 입원과 수술을 반복, 이젠 체념에 가까워진 영준씨다. 희망이란 말이 이렇게 아픈 것이었던가. 빛바랜 영준씨의 표정. 주변분들을 통해 들은 그의 이전 성격은 한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두 세 명이 간신히 들어갈 1인용 요양실 한켠에 놓인 사진 속 영준씨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감 넘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연세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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