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청춘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2회

 

“거기 그대, 피곤하신가요? 당신은 왜 피곤한가요?”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이 될 수 있겠다. 전통사회였다면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사회적 신분과 천직, 성적 역할이 주어졌을 것이고, 그것이 존재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란 사회적으로 배당된 역할에 얼마나 잘 부합되는가에 따라 평가되고 천직을 거부하는 사람에겐 비난 혹은 추방이 뒤따랐겠지.

그러나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르다. 물론 사회적인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으려는 다수의 시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20세기 젊은이들이 외치던 자기실현의 이상은 그런 사회적인 종속들로부터 나의 동일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공동체 내의 준규를 버리고 ‘사회야 가족이야 어쨌든 제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냐’가 아니다. 진정한 자기실현이란 결국 관계를 떠나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현대 사회’의 저자 찰스 테일러는 “내가 나의 정체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공개적인 대화, 또 부분적으로는 내면의 대화를 통하여 만들어 내어, 내 정체성이란 타인들과 나의 대화 관계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와 같은 자기진실성의 이상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인의 대인관계는 단순히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게 된다. “단순히 도구적인 인간관계만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직이나 계급,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역할로,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짧은 질문에 답을 내리기란 웬만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가 된다. 사회적인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는 동시에 영혼의 언어로써, 사회적인 정체성을 수용하고 재생해야하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놓인 우리들은 존재, 그 자체가 피곤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끙끙거리다 마침내 수학문제의 답을 찾아내본 그 쾌감처럼 생애를 마감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동하는 내 정체성을 따라가는 것도 꽤 괜찮은 유희가 아닐까. 연세대에 다니고 있는 몇몇 학생들(외국인학생 포함)의 얘기를 들어봤다. 기사는 총 3회로 나뉘어 연재된다. 두 번째 이야기다.
 

‣연세대 국제학부 2학년 N.K(가명)

사람을 정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향상 변하고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이것에 관심이 있고 내일 다른 것을 좋아할 수 있다. 그래도 어떤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에서 살았을 때 나는 내가 ‘핀란드사람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사실 핀란드에서도 나는 항상 좀 달랐다. 남들은 별 생각 없이 학교 다니고 일을 하곤 했지만 나는 호기심이 너무 많아 이 넓은 세상에서 핀란드라는 나라에만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하고 다른 나라에 가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내가 얼마나 핀란드 사람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처음 서울 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충격적이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누가 나와 부딪히고 사과를 하지 않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핀란드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핀란드사람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것 같다. 핀란드사람들은 개인 공간을 존경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가까이 서 있는 것도 불편하게 느낀다. 그런데 한국에는 개인 공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대중교통에서 많이 느낀다.

그러나 국적이나 모국 문화만이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건 아니다. 같은 국적의 사람들일지라도 개인별로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나의 특징 중 나의 성격에 큰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은 바로 아까도 언급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독서를 시작한 때부터 책, 특히 우주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 때 내 꿈은 우주비행사였다. 이제는 그 꿈을 포기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그 궁금증이 살아 있다. 나는 무조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삶을 살고 싶다.

또 나의 정체성의 한 부분은 지독한 독립성이다. 독립성이 부족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조차도 스스로 못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다. 한 친구는 이제 24살인데 아직도 어머니와 살고 모든 것을 먼저 어머니에게 물어본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어머니 의견과 반대되면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가족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나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서 의존한다면 나는 좀 슬프다고 생각한다. 내 가족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책임감을 많이 앉겨주고 공부도 항상 스스로 해야 했다. 우리 어머니는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가끔은 어머니가 내게 관심이 없는 것같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배우고 책임감을 갖는 것이었다. 가끔 조금 더 관심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에서야 우리 어머니의 방법을 꽤 감사히 생각한다. 그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믿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할 수 없음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다. 내 안에 있는 그 힘을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을 수가 없다. 그 힘으로 먼 타지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다. 대학생 기자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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