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종로경찰서(현 종로사거리 제일은행 자리)

종각역에서 제일은행 쪽으로 나오면 제일은행 건물 앞 화단 터에 옛 종로경찰서가 있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데 가장 악명을 떨친 기관이었다. 종로경찰서에는 `염라대왕`이라 불리던 고등계 주임 미와 경부가 있었다. 미와는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체포, 악랄한 심문을 가해 독립운동가들은 치를 떨었다.


 

2.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김상옥 의사는 고종 27년(1890) 동대문 안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3·1운동 때에는 혁신단을 조직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경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의사가 폭탄을 던진 후,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권총으로 자살하여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도 캠플 주사까지 놓으면서 배후를 캐물은 악질이 바로 미와 경부였다. 그는 8·15광복 직후 일본으로 줄행랑을 쳤다.


 

3. 재판 광경

1912년 일제는 복잡한 사법제도를 정비했다. 재판소를 법원으로 바꾸고,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으로 계통화했다. 지금도 우리 사법부가 원용하고 있는 이른바 3급 3심제 체제였다. 고등법원은 당시의 대법원격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판사는 약 250여명, 검사는 50여명이었다.


 

4. 남대문통 거리 (1930년대)

일제 시기 남대문 일대는 중앙우체국과 조선은행, 조선저축은행,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 지점 등이 위치해 있어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불리었다. 그러나, 식민지하 조선인들에겐 여전히 `우울한 화려함`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시인 김광균은 이 광장의 외로운 이방객 신세를 시로 읊기도 했다.


 

5. 광복 직전의 남대문통

 

 

6. 건설공사 중인 경성역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정식 업무를 개시하면서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월 제3대 총독 사이토가 부임차 이 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무렵 64세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에게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이후 1925년 옛 남대문역의 역사는 용산역으로 옮겨지고, 웅장한 경성역사가 새로 완공됐다. 지금의 서울역 건물이 바로 그 것이다.

 

 

7. 완공된 경성역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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