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우리 곁의 호박 ②

▲ 보따리에 고이 싸서 모셔 왔으리니. 늙은 할매 오늘 장바닥에 납셨다.

오일장의 호박

“가다가 주저앙거불었어. 넘의야여. 팽야 우리 유재 사람인게 조까라도 벳겨주고 갈라고.”

아짐 할매들마다 손톱 밑이 까매져서 감자대(고구마줄기를 여기서는 다들 그리 부르신다) 벗기기 삼매경에 든 순창장.

장 보러 나온 이순자(58·순창 유등면 건곡리) 아짐도 꽃무늬 고운 양산을 장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하나둘 벗긴 감자대를 쌓아가는 중이다. 손이 시나브로 물들어간다. 이 물든 손이 오늘 순창장에선 우리가 ‘유재 사람’이라는 것의 증거.

 

▲ 아직 장터를 찾는 발길이 드문드문한 이른 아침의 담양장. 좌판의 배열을 고치고 고쳐서 스스로 ‘완성’을 확인하는 아짐의 모습엔 경건함이 서려 있다.

 

▲ 호박 다라이에 고구마순을 폭삭하게 깔았다. “안 깨끼라고. 궁글어댕기문 기스 나고 흙몬지 묻잖애.”

“지비도 얼릉 와서 벳기랑게.”

지나던 아짐이 자꾸 보태지고 왁자한 웃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품앗이의 질기고 오랜 습성 버리지 못하고 장소불문 둥글게 둘러앉아 내남없는 일 공동체를 이루고야 마는 아짐들인 것이다. 장터는 그렇듯 둥근 마음들의 집합처. 호박 고구마순 가지 고추 당근…. 그것들을 ‘내야 밭’에서 키워내기까지 흙의 노고도,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아짐 할매들의 노고도 다라이 다라이마다 둥글게 둥글게 담겨 있다.

장터에 앉은 채소 중에 가장 풍채 좋은 것은 누렇게 잘 익은 맷돌호박일 터. 그 중 가장 큰 맷돌호박의 주인은 순창읍에서 온 아짐이다.

“마디호박도 야닯 개 갖고 나왔는디 오다가 친구를 만났어. 다섯 개는 들고 가겄다 허고 줘 불고 시(세) 개 남은 것은 팔고.”

팔려고 장만한 호박일지언정 오다가다 벗을 만나면 ‘들고 갈 만치’ 앵겨줘 버리는 인정이 그이의 두둑한 자산.

 

▲ “올해는 가문께 호박도 귀해. 요 가뭄에 요만치 나온 것도 장하구만.”
▲ 그 어느 좌판이든 이맘때 끼여있기 마련인 호박 바구리.

 

“맷돌호박을 3월달에 숭궜어. 놈들은 온난화 땜에 너머 일찍 숭구문 삶아진다고 그러는디 올해 호박이 너무 일찍 늙어불었어.”

할매가 장터로 나설 적에 싸온 보따리 그대로 얌전히 풀어진 채 장터 바닥에 앉은 늙은호박도 있다. 할매와 더불어 또 다른 할매인 양 오두마니.

고등어 갈치 놓인 어물전에 난데없이 호박이 끼여들었다.

‘난입’이 아니라 특별초청된 귀빈처럼 스댕그릇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해남 남창장 어물전.

“호박은 여러 가지에 다 아우라져. 고등애랑도 좋고 갈치랑도 좋고. 두루두루 짝꿍이 돼. 호박 여서(넣어서) 약한 불로 짜갈짜갈 지져노문 푸근푸근하니 맛나.”

어물전 할매가 말하는 호박의 미덕이다. 그리하여 봉다리 봉다리 들고 ‘짝꿍 할’ 호박을 사러 갈 걸음을 기왕이문 아껴 드려야 쓰겄다고 어물전 좌판에 호박을 불러앉혀 바다와 들을 한 묶음으로 팔고 있는 것. 고객맞춤형의 살뜰한 배려, 생활밀착형의 상상력이 낳은 지혜로운 디스플레이 아니런가.

언뜻 쌩뚱맞지만, 참으로 맥락 있는 전개다.

 

▲ 장터의 호박. 크고 작고, 둥그렇고 잘쭉하고, 찌그러진 구석도 있는 호박들은 생긴 대로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다.

 

순창장의 김경애(70·순창 유등면 창신리) 아짐은 장에 나올 적 호박 다라이에 고구마순을 폭삭하게 깔았다.

“안 깨끼라고. 궁글어댕기문 기스 나고 흙몬지 묻잖애.”

무어든 애틋하고 귀히 여기는 손길에 ‘함부로’는 없다. 내야물견이 한 점 흠 없기를 바라는 그 마음 가닿아 아짐의 호박들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호박잎이 조연의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좌판도 있다. 몸집 덩실한 호박의 받침으로 쓰인 호박잎.

“호박이 다칠깨비, 허허.”

호박에 바친 순정한 받침이다.

 

 

“오늘 샘(삼)형제 데꼬 나왔는디 한나는 몬야 갔어(팔렸어).”

‘형제’라고 의인화하는 그 마음이 정답다. 이옥순(75·순창읍 남계리) 할매.

“올해는 가문께 호박도 귀해. 요 가뭄에 요만치 나온 것도 장하구만. 팽야 여름에는 요런 거 묵제. 호박 가지 오이….”

어매들이 호명하는 여름채소 3총사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호박.

“왜 해필 시방 왔으까 잉.”

다라이에 든 호박을 사진기로 찍어서 책에다 낸다고 하니 순창장 할매들은 ‘해필 시방’이라고 서운해 하신다.

“딴 때 같으문 시방 호박 천지여. ‘내야 살지니야 살지’ 그럴 때여. 올해 호박이 물짜. 가물어도 너머 가물었어. 호박이 생개도 크들 못허고 보타져서 빡빡 얼거(얽어). 조깨 인물이 나슨 놈은 일찍 오신 양반들이 갖고들 가셨어. 오매 으짜까, 이런 (호박)인물을 찍어 가문 순창장 호박이 다 이란 줄 알 거 아녀. 근디 호박은 인물로 묵는 것이 아녀. 얼거도 맛나.”

 

▲ 고등어, 갈치에 ‘짝꿍 할’호박을 사러 갈 걸음을 기왕이문 아껴드려야 쓰겄다고 어물전 좌판에 호박을 불러앉힌 살뜰한 배려.
▲ 호박잎이 조연의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좌판도 있다. “호박이 다칠깨비, 허허.”

 

장터에 아짐 할매들이 데불고 온 호박들은 획일화, 규격화와는 거리가 먼 모양새다. 크고 작고, 둥그렇고 잘쭉하고, 찌그러진 구석도 있는 호박들은 생긴 대로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다.

담양장 빗자루 좌판 앞엔 뜬금없이 황금색 보자기 하나 펼쳐둔 위로 늙은오이 몇 개 그리고 호박 한 덩이가 놓여 있다.

“사가셔. 내야 아녀. 쩌그 저 각시야여. 거그다 갖다 놓그만.”

‘내야’와 ‘넘의야’, 내 자리와 넘의 자리가 경계 없이 무너지는 자리. 장터는 그런 곳이다.

설금순(72·순창 풍산면 죽곡리 상죽마을) 할매는 오늘 첨으로 장에 나왔다.

“장사꾼이 모지래더니 한나 더 생갰다고 좋아라고 반가와라고 그러그만.”

허리 굽은 할매들이 지키고 있는 오일장터에서 보따리 좌판 하나 더 생기는 것은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무의 등장이다.

“더우에 무고하셨는가?” “잉. 당아 안 죽고 살아있지맹. 허허.”

누구 다른 사람 소식인 양 ‘별고 없음’을 확인하고 껄껄 웃는 인사가 오간다. 아직 장터를 찾는 발길이 드문드문한 이른 아침의 담양장. 좌판의 배열을 고치고 고쳐서 스스로 ‘완성’을 확인한 다음 좌판의 ‘주인석’에 앉는 할매는 담양 월산면 신계리에서 ‘내 손으로 밭에서 키운 것 및 가지’를 갖고 나왔다.

“호박이 째깐했을 때는 이삐드니 큼서 물짜져불대. 도란장에는 조깨 나슬 것인디.”

‘도란장’이란 그런 것이다. 거창하고 허황한 것이 아니라 ‘조깨 나슨 호박’을 기약하고 기대하는 것.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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