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생각> 류승연

정유라…가 아니고 정유년이 밝았다. 썰렁했나? 어느 개그 프로에서 하기에 똑같이 따라 해봤다. 올해는 좀 웃고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서.

어쨌든 새해가 시작되었고 저마다 한 해의 계획을 세운다. 나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해서 이만큼의 성과를 내는 한 해가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물론 27년 째 빠지지 않는 계획은 다이어트다. 중학교 1학년부터 41살에 접어든 지금까지 매번 다이어트는 그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다짐이었다. 슬픈 사실은 단 한 번도 계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올해도 실패하면 내년부턴 그냥 뚱땡이인 채로 살 빼는 건 포기하고 살련다.

 

 

올해는 특별한 한 해가 될 전망이다. 올 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고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12시 40분까지 아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야 했기에 무엇 하나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도 12시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5교시 수업 날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 못하고 사는 평범한 이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처럼 장애 아이를 키우느라 언제나 시간에 쫓겨 사는 이들은 한 시간 한 시간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온다.

활동보조인이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출근, 아들을 치료실에 데리고 다닌 뒤 집으로 돌아와 간식을 먹이고 매일 오후 5시까지 봐주면 나는 실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활동보조인에게 더 늦은 시간까지 아들을 맡기고 직장에 나가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만 아이들이 어린 데다 아직은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때라 오후 5시부터는 아이들 옆을 지키기로 했다.

올 봄부터 시작될 변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8시간의 내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다. 바로 한 달 전까지는 꿈도 못 꿨던 일이다.

주변에서 묻는다. 갑자기 늘어난 많은 자유시간 동안 무엇을 할 거냐고. 지난해 연말, 우리 가정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겪으며 나는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남편과 아이들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는 일. 하고 싶다기보단 내가 하면 잘할 일. 그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지난 연말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일인지는 밝힐 수가 없다. 중요한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미리 설레발치면 꼭 ‘파토’가 나는 징크스가 있기 때문에 조용히 움직이려 한다.

어쨌든 남은 반평생을 위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정해지고 나니 삶의 집중도가 놀라울 정도로 올라갔다. 해야 할 일을 최우선에 두자 그 외의 잡다한 일들은 모두 소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전까진 분산돼 있던 에너지가 한 곳에 집중되는 느낌.

가장 먼저 변화가 온 것은 인간관계다. 해야 할 일은 올 여름을 지나며 첫 발을 내딛고 2년 정도 있어야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날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보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내 시각에서 먼저 변화가 찾아왔다. 지지고 볶고 질질 끌던 문어발식 인간관계를 스스로 대청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동네 아줌마들과의 관계가 가장 먼저 바뀌었다.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자 아줌마들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나도 모르게 소홀해졌다.

유치원 시절부터 횟수로 4년, 만으로 3년에 접어든 인간관계다. 하루에 천 건이 넘는 카톡이 오갈만큼 많은 수다를 떨었고, 술도 마실 만큼 마셨고, 내 생애 처음으로 성인나이트에도 함께 가 본 전우들이다.

하지만 동네 아줌마 모임이라는 건 친하고 가까운 만큼 성가시기도 한 것이었다. 서로의 성격 및 집안 속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는 데다 자칫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아줌마들의 아줌마들의 아줌마들을 통해 많은 말이 돌았다.

‘인간관계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한 때는 아줌마 네트워크의 수를 늘리는데 주력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난 무엇 때문에 말 많은 아줌마들의 사교 모임에 열을 올리고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것일까? 동네 아줌마들과 친해야만 내 아이가 그 아줌마들의 아이들과 친해질 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아이들은 스스로 큰다. 엄마들이 만들어 준 무리 내에서 어울려 지내는 건 유치원 때까지가 마지막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스스로 친구를 선택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

일부러 멀리 하려는 게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인 정이란 것도 있다. 다만 이전까진 애를 써가며 관계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 지금부턴 그런 것들에서 손을 놓으려 한다.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단체톡방에서 내용을 읽지도 않고 대화에 참여도 않다가 밤늦게 멘트 한두 개 보내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벌써부터 삐진 아줌마도 생겨났다. 어쩔 수 없다. 인생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게 아닌 함께 놀지 않는다고 삐지는 관계라면 더 이상 연연할 이유가 없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난 ‘용도별’로 친구들을 ‘관리’해 왔던 것 같다.

좋은 곳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모임, 아무 때나 번개를 소집해 술을 마실 수 있는 모임, 남편과 시댁 욕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모임, 지적인 대화가 가능한 모임, 가족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는 모임 등 친구들도 그 때 그 때의 용도에 맞게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나를 보고 주변에선 ‘발이 넓다’ ‘인맥이 많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 친구조차 관리하며 인생을 살아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 개인보다 모임 자체에 더 비중을 두게 됐다.

해가 갈수록 성향이 안 맞는 게 도드라지고 막상 나가도 즐겁지 않았지만 모임 자체를 잃고 싶지 않아, 또 꽤나 잘 어울리는 척을 했기 때문에 웃는 얼굴로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친구 관계는 이제 그만 청산하는 게 옳은 일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런 관계는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다. 같이 학교를 다닌 동창이라면 모를까. 개인 대 개인의 공감과 친밀함이 없는 관계가 무슨 친구란 말인가!

물론 전에도 인간관계를 정리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천 명의 연락처 중에서 이리저리 다 삭제를 하고 300여 명 정도만 남겨뒀는데 어느 날 보니 또 400명으로 늘어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새 폰으로 바꾸며 기존의 연락처를 이동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번호들은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거추장스러운 관계들을 걸러 가며 새로이 주소록을 꾸밀 수 있다.

40년을 살았다. 남은 40년을 더 살면 된다. 이제부턴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내 사람들하고만 알콩달콩 남은 반평생을 살고 싶다.

내가 그랬듯, 사람들을 많이 알면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착각을 하고 산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나 업무에 필요한 경우에는 휴대폰 속 연락처의 이름이 많아질수록 좋은 측면이 많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의 도움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을 나누고 남은 인생을 함께 걸어가 줄 지인들을 찾는 것이라면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자주 만나는 횟수도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이 생겼고,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승부를 걸어볼 시기가 됐다. 주변의 잡다한 것들을 정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해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려 놨던 인간관계를 한 차례 정리하고 나면 2단계로 넘어간다. 2단계는 집안 대청소다. 바로 1년 전 온 집의 벽지까지 다 뜯으며 새 집을 만들어 놨는데 1년 만에 다시 헌집이 되어 버렸다.

다시 하면 되지 뭐. 작년 1월에는 몰두할 게 필요해서 집안을 뒤집어 놨다. 올 1월에는 정리하고 버려가며 가뿐해지기 위해 집안을 뒤엎을 계획이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기 시작하는 건 3월이 될 전망이다. 장애인 등급 재심사, 활동보조인 서비스 신청 및 심사 등을 모두 거치고 나면 올 봄부터 내 등에도 날개가 달린다.

기존까지의 내 인생도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이제부턴 좀 다른 차원의 인생도 살아볼까 한다. 더 바빠지고 더 정신도 없겠지만 그래도 무서운 집중력과 부지런함으로 모종의 성과를 거두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올해는 꼭 다이어트에 성공하길 바란다. 나도 몸무게 앞자리가 5자인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 안 입는 옷은 있어도 못 입는 옷은 없는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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