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사라져가서 아쉬운 것들이 있다.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다. 시대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정겨웠던 곳들이 문을 닫아간다.

사인펜으로 눌러 쓴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란 종이 한 장만이 텅 빈 가게 문 앞에 붙어 펄럭펄럭. 문을 닫은 건 가게인데, 내 청춘의 페이지가 또 한 장 닫혀 나가는 것만 같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들과 산책 겸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어른 걸음으론 왕복 20분 거리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다섯 발자국 가다말고 개미를 죽이기 위해 멈춰 서거나, 열 발자국 가다말고 차량 진입금지 표시물에 올라간다.

 

 

어르고 달래고 때론 소리도 질러가며 한 바퀴를 겨우 돈다. 마지막 코스로 집 앞 편의점에 간다. 아이들은 초코우유 하나씩 먹고 어른들은 커피 한 잔씩 마신다. 가끔 편의점 대신 책대여점이 마지막 코스일 때도 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만화책을 보며 천국 같은 휴식을 즐기기 위해서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하루. 딸과 함께 앞서가던 남편이 “어!”하고 놀란다. 책대여점이 문 닫았다. 바로 2주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는데….

오랜만에 ‘클레이모어’를 처음부터 다시 보려 벼르고 있던 터라 발이 동동 굴러진다. “어떡해~ 이젠 어디서 빌려 봐?” 여기도 두 번째로 찾은 곳이다. 원래 가던 단골 책대여점이 몇 년 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뒤 골목골목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곳이다.

“잠깐, 우리 남은 돈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니 그렇다. 보통 1만원씩 선 입금을 하고 책을 빌려보는데 6000원 정도 남은 금액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나 급하게 문을 닫았으면 미리 회원들에게 문자로 알리지도 않았을까.

첫 번째 단골집이 문을 닫을 때 사장님 내외는 입버릇처럼 힘들다는 얘기를 했었다. 요즘엔 다들 휴대폰으로 만화를 보는 추세라 갈수록 사람들이 책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휴대폰으로 만화 보는 게 싫은 1인이다. 만화책은 집에 산더미만큼 빌려다 놓고 몇 시간동안 그 안에 푹 빠져 완독을 하는 게 제 맛이다. 옷은 최대한 편하게 입고 옆에는 투게더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통 있으면 더 좋다.

한 장씩 넘기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대하는 재미. 넘기다보면 어떤 페이지에선 코딱지가 나오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에선 머리털은 아닐 것으로 의심되는 꼬불꼬불한 털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손바닥만한 휴대폰에 코 박고 손가락으로 슥슥 터치하느라 그런 재미를 놓쳐야 하다니….

동네에 남은 마지막 책대여점이 문을 닫은 후 만화책 금단 증상이 와서 인터넷으로 급하게 검색을 했다. 거리가 좀 멀더라도 만화책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찾아보니 만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이 있다.

알고 보니 지하철역 주변으로 형성된 유흥가에 세 곳이나 만화카페가 들어섰던 것이다. 1층이 아닌 2층이나 3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동안 몰랐던 것.

며칠 뒤 찾아가보니 옛날식 만화방과는 달리 깨끗하고 세련되게 잘 꾸며져 있다. 누워서도 볼 수 있을뿐더러 각종 음료와 간식들도 잘 구비돼 있다. 하지만 대여는 안 된단다. 오로지 읽고 갈 수만 있다고.

한 마디로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인 셈이다. 집에 돌봐야 할 어린이들이 있는 부모들은 맘 놓고 카페에 가서 만화책을 읽고 갈 처지가 안 된다. 아~ 이젠 새벽까지 만화책을 보며 뒹굴 거리던 재미를 더는 느낄 수가 없게 됐구나~. 아쉬움만 한 가득.

책대여점만큼 아쉬운 것이 또 있다. 바로 DVD방이다. 요즘은 집집마다 VOD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면서 DVD방이 자취를 감췄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 두 군데나 있었는데 이제는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극장에 가서 보는 영화도 좋았지만 DVD방에 가서 보는 영화도 좋았다.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가서 볼 때는 우리끼리 중간 중간 수다도 떨어가며 볼 수 있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갈 때는 샌드위치나 아이스크림 등 간식거리를 사서 편하게 먹으며 볼 수 있어 좋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집에서는 영화를 영화답게 보기가 힘들다. 아이들이 학교 가있는 오전 시간에는 나도 밖에 나가 일을 봐야 해서 영화를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인 늦은 밤에는 VOD로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소리를 1로 맞춰놓고 봐야 한다. 아이들이 깨면 안 되니까. 그러다보니 대사를 들어야 하는 한국영화는 엄두를 못 내고 자막을 읽으며 내용을 이해하는 외국영화만 보게 된다.

그나마 DVD방이 있을 때는 가끔씩 기분 전환하러 저녁에 나가 영화 속에 푹 빠져 있다 오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또 스트레스가 풀리곤 했는데….

어디 그 뿐일까? 동네 서점도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 올 때만 해도 동네서점 두 곳이 있었는데 한 곳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남은 한 곳은 오로지 참고서와 문제집만 파는 학습용 서점이 되어 버렸다.

대신 큰 도로변에 대형서점들이 하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형서점도 대형서점대로 장점이 있지만 동네 서점이 좋았다. 소박함이 좋았고, 편리함이 좋았고, 무엇보다 서비스가 좋았다.

책을 살 때마다 펜이나 작은 장난감 등을 선물로 주곤 했고, 사탕이랑 젤리도 책을 고르는 동안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한 쪽에서는 복사와 출력도 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대형화되어 가긴 카페도 마찬가지. 한 때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작은 카페들이 2년도 안 돼 우수수 문을 닫았다. 작은 카페들은 커피 외에 각자를 대표할 디저트들을 갖고 있었다. 어떤 곳은 와플이 맛있었고, 어떤 곳은 수제 샌드위치가 히트를 쳤다. 사장님만의 특별한 비법이 숨어 있던 각종 디저트들.

지금은 그 카페들 대신 대형 체인점의 카페들만 북적북적하다. 전국 어디를 가나 똑같은 맛이 나는 커피와 조각 케이크와 샌드위치와 빵의 향연.

1인 기업처럼 운영되던 또는 부부가 함께 꾸려나가던 영세 자영업자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서 작은 것들이, 소박한 것들이 사라져 간다. 동네의 풍경은 더 크고 화려한 것들로 변해가지만 그 화려함 속에서 소박한 이전의 것들이 그리운 것을 보니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긴 되었나 보다.

아,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소박한 가게가 하나 있긴 하다. 우리 집 골목을 내려가면 바로 있는 ‘까치 분식’이다. 마침 초등학교와 여중, 여고, 남고가 모여 있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큰 경영난은 없어 보인다.

소박하다 못해 웃음이 나기까지 하는 이 곳. 아주 작은 실내에는 네 개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데 그나마도 자리가 좁아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테이크아웃을 한다.

종이컵에 담아주는 떡볶이가 500원, 종이컵에 순대를 담고 떡볶이 국물을 끼얹어 주는 컵순대는 1000원이다.

환경호르몬이 절절 나오게 생긴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주는 참치주먹밥은 1300원인데 떡볶이와 함께 버무려 나오는 건 2000원이다. 사과잼과 흰 버터크림이 듬뿍 발린 와플은 1000원이다.

주로 하교 길 여중 여고생들이 이곳에서 간식을 사 학원까지 먹으며 걸어가곤 한다. 나도 단골이다. 어쩔 때는 컵볶이를 하나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먹기도 하고, 조금 더 많이 먹고 싶을 때는 떡볶이를 1000원 어치 주문해서 포장해 달라고 한다. 밀가루 떡에 어묵 한두 조각이 들어간 떡볶이. 가격이 싼 만큼 야채는 찾아 볼 수 없지만 맛 하나는 일품이다. 어떤 조미료를 쓰는지 감칠맛이 좔좔. 이따금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맛이다.

나는 크고 화려한 것이 좋다. 항상 그래왔다. 세련되고 깨끗한 것이 좋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소박함들도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소박함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그 애잔함이 사라져 간 것들 때문인지, 그 속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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