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수 칼럼> 믿을 수 없는 사회

이번의 릴리안 생리대와 살충제 달걀 사건, 근래에는 옥시 사건도 있었고, 메르스나 지카 바이러스와 같은 감염성 질환에 대한 예방 또는 방역책의 부재, 구제역과 AI를 비롯한 동물 감염성 질환 영역에서의 방역책 부재 등등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너무나도 제시할 것이 많을 것이다. 특히 소비자들이 신뢰하여 구매하는 소비 상품에 있어서도 유해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문제다. 이젠 마트를 가더라도 뭐 하나 믿고 살 수 없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결국 방법 없는 불안함에 빠져버려 소비자들은 괴로움을 겪고 있다. 생리대에 유해 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 사회는 이처럼 수많은 불신에 직면하고 있다. 그동안은 그저 신뢰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왔지만 사회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과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넘어가버렸던 일들이 하나 둘 그 껍질을 벗고 있다. 그런 불신들이 시민들의 생활공간 안쪽에서 드러나면서 시민들은 더 큰 불안과 불신으로 사회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생리대에서 유해물질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가장 위생적이고 가장 소비자에게 믿음을 줘야할 물품과 그것을 생산해내는 기업들이 소비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제 2의 옥시 사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믿음직한 공급과 믿음으로 가득한 소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소비 사회에서만 믿음이 부재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다. 정부가 관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불신하고 심지어 정부를 불신하는 일부 시민들의 태도 또한 사회 전반에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믿음을 어떻게 재건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국가를 믿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국가의 시스템 속에서 불안에 떨고, 왜 우리는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가.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오래 유지해온 관료 사회가 있다. 더 이상 관료들로 하여금 국가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은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생활 사회를 위해서라도 시민들의 참여가 매우 중요해졌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시민단체들 뿐만 아니라, 시민 개개인이 국가의 일에 참여하고 감독함으로써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재편성되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에 지쳐 있는 시민 개개인들에게 생활 속에서의 참여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리어 시민들을 대표하라고 뽑아놓은 자들이 대체 무엇을 하기에 이토록 국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지 따져 묻는 것이 사리에 맞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은 생활 외적으로 무언가 참여하기 또한 어렵고, 믿음이 없어진 사회에서 불신은 깊어가지만 그 불신이 해소될 방법 또한 마땅히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믿을 수 있는 사회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국가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발판은 국가가 만들어야 할 몫이다. 국가가 스스로 관료 사회 그 바깥의 것으로부터는 꽁꽁 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여전히 관료 체계와 평범한 사람 간의 골은 깊어지기만 할 것이다. 관료가 시민에 의해서 감시되고 감독될 수 있는 체계를 다시 꾸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 안에서 시민단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턱없이 적다는 것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단체의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시민단체의 운용 자체가 어려운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관료 사회에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면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 역시 충분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고 관료 사회에서 내놓는 결과물들을 무비판적으로 시민들은 수용하게 된다. 실제로 평범한 시민이 시민단체를 운용하려면 너무 많은 예산과 후원, 체계의 확립 등이 필요하다. 후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국에서의 시민단체 활동은 철저히 방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양산되어야 될 필요성이 있다. 믿음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움직이는 방법밖에는 없다. 직접 시민들이 움직임으로써 국가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바로잡아야만 한다. 관료 사회가 녹슬고 그 체계가 무너진다면 시민 사회로 하여금 그 부분들을 대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먹거리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사용하는 것들 중에 위생을 필요로 하는 것들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검사하는 것은 원래 국가의 몫이지만, 그 국가를 믿을 수 없다면 시민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시민의 무기력함이란 가장 문제가 되는 요소다. 참여하는 시민들로 하여금 그 가이드라인을 제작해주어야 한다.

 

평소 막힘 없이 달리던 출근길
오늘따라 극심한 체증이다
거북이걸음 운전으로 결국 지각하고 말았다
어느 지점, 자동차 사고 때문이었다

둘러보면
사거리나 건널목
때론 주차장에서조차 충돌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대차는 물론 대물 대인사고까지

눈이 오면 눈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왔다고
안개가 끼면 안개가 끼었다고
이유도 가지가지다

운전대엔 운전자의 믿음이 걸린다
운전자는 항상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만 운전대를 꺾는다

믿음과 믿음이 충돌하고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르기도 한다
믿음이 클수록 문제도 커지고
자신감이 넘칠수록 충격이 커질 때 있다

지나고 보아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진정한 믿음을 보게도 된다

믿음은 때론 자신의 큰 적이 되어
나타난다
착시 혹은 착각처럼

믿음은 언제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거나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기도 한다

- ‘믿음에 대하여’ / 안재동

 

믿음은 때론 우리의 큰 적이다. 우리의 잘못도 물론 있을 것이다, 나라를 이렇게까지 불신하게 된 것은. 그러나 그렇다고 손을 놓고 내버려두어야 할 일이 아니다. 착시 혹은 착각처럼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들을 믿어야 한다. 국가와 정부를 믿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자신을 믿고 그 믿음과 함께 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 관료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고 우리 식탁과 우리 사회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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