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진수의 ‘서울, 이상을 읽다'-2회

 

시인 이상은 분노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분노라는 감정은 그의 시에서 확연히 드러날 때가 많다. 어떤 사물에 대한, 공간에 대한, 사람에 대한, 더 깊이 들어가면 그의 가족사와 인간사에 대한 분노가 그의 시로부터 치밀어 오른다. 하나의 시를 읽고 이야기하자.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시 제2호’, 이상

 

그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이다. 실제로 그의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다. 어려서부터 백부의 손에 자란 이상에게 아버지라는 자리 혹은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회한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기보다 무언가 모조리 쏟아내듯이 시 속에서 퍼부어댄다. 어쩌면 아버지, 아버지가 된 자식,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로 살아가는 삶의 순환적 성격에 대해 토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도 이상의 생각을 완전히 알아낼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니까. 남은 건 오직 그가 남긴 시와 소설을 비롯한 글들이다. 그러나 그의 분노가 남긴 흔적은 시 곳곳에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에서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그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왜 나는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에서도 아버지라는 역할이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역할 또는 존재는 시인 이상에게 분노의 대상인 동시에 부담의 대상이었다. 아버지 노릇이라는 것에 증오를 느끼고, 자신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지만 그러기에 자기 자신이 너무 많은 부담을 느낀다는 것을 시인 이상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와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한계와도 같이 작용하는 것이었고 이에 원망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분노는 이처럼 그의 시의 원동력이자 그의 감정이 폭발하게 도와주는 일종의 배출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시 속에서 계속 같은 말을 번복하거나 어떤 표현을 주제처럼 반복하는 것은 꼭 분노를 표현해낼 때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의 아이러니컬함을 보여줄 때도 똑같은 표현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꼭 말의 미로에 갇히는 것처럼. 그의 시를 하나만 더 읽어보자.

 

▲ 시인 이상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시 제3호’, 이상

 

이 시는 싸움하는 사람에 관한 것도,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에 관한 것도 아니다. 도리어 실제 싸움이 있었는지부터 궁금할 지경이다. 이상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싸움’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싸움하는 사람, 싸움하지 않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이 셋으로 나누어 시를 읽으면 느낄 수 있다. 전혀 별개였던 세 존재가 천천히 하나의 문장이 된다. 원래는 싸움하는 사람과 싸움하지 않는 사람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니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문장 안에 싸움을 하든, 싸움을 하지 않든, 구경을 하든, 그랬으면 됐지 별 것 없다는 투로 시를 마무리한다.

그의 마무리가 얼마나 아이러니컬하고 무의미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인 이상은 실제 치고 박는 싸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싸움이란 뭔가 큰일인 것처럼, 혹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떠벌려지기 마련이지만 상당히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인 이상이 이 시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세계는 매우 아이러니컬, 즉 모순적이다. 싸움은 싸움하는 사람끼리 끝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알고 보면 구경꾼들이 흥미를 잃고 하나 둘 떠나가 버리고 나서야, 싸움하는 사람들은 머쓱해져 싸움을 끝낼 수도 있다. 결국 애초에 그의 시 속에서는 싸움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싸움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간에 싸움을 붙여놓지도 않았다. 그저 무의미하게 끝나버릴 싸움이었다.

‘시 제2호’와 ‘시 제3호’가 공통점으로 가지는 것은 어떤 무기력함이다. 전자에서는 강렬한 분노가 뒤섞인 감정의 회오리가 있다하더라도 점점 전개되면서 무기력함이 만연해진다. 결국 자신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 노릇이란 무엇인지조차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밀려드는 무기력함이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발설한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자기 자신이 기대하는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다. 시인 이상의 실제 삶을 살펴보더라도 그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들은 유효할 것이다.

후자인 ‘시 제3호’는 전자와는 조금 다른 무기력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삶의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세계를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싸움이라는 격렬한 주제를 가지고도 담담하게 말하는 시 속의 어조는 애초에 그의 시가 무의미한 세계를 두고 쓰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인 이상, 그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이 무기력함을 느꼈기에 그는 삶속에서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세계와 이상향에서도 무의미한 것들을 찾아 헤맸을까. 난해하기만 한 그의 시 속에서 천천히 슬픔과 동정심이 피어오르는 것은 왜일까. <대학생>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