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신묘생 어르신
우리 동네 신묘생 어르신
  •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7.09.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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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마을모정 ⑥-진안 백운면 덕현리 동산마을 모정
▲ 진안 백운면 반송리 개안정.

 

짚방석 한 조각만 있어도 사람을 상쾌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하물며 네 기둥에 지붕을 올리고 녹음으로 네 벽을 두른 어엿한 모정임에랴.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 하였으나, 쌀 한 톨에만 일곱 근 땀방울을 바치겠는가. 땀을 동우로 흘러내고서야 근근이 살아지는 사람들에게 모정은 더욱 다디단 휴식의 공간이다.

울 없고 담 없고 걸림 없고 막힘 없어 활연히 열린 모정에는 오늘도 장삼이사의 수수많은 인연들이 쌓이고 있다.

 

▲ 서까래 사이에 바른 흙부스러기가 이따끔 툭 떨어지곤 하는, 요새말로 하자면 '친환경 생태건축'. 진안 백운면 덕현리 동산마을 모정. 마을 사람들이 지성으로 어루만지고 보듬아 온 덕분에 처음 지었을 적 순정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벌이 흙을 자꼬 내려놔불어.”

서까래 사이에 바른 흙부스러기가 이따끔 툭 떨어지곤하는, 요새말로 하자면 ‘친환경 생태건축’. 진안 백운면 덕현리 동산마을 모정이다.

굵은 대로 가는 대로 굽은 대로 곧은 대로 저마다 생긴 그대로 자리한 서까래 아래 믿음직한 대들보가 굵은 몸뚱이를 유연하게 틀고 있다.

“저렇게 고불고불한 것들을 어찌 균형을 맞추셨는가 몰라. 옛날 분들이 참, 뭣도 알고 멋도 알고 솜씨도 좋고 힘도 좋고 그러셨어.”

김순례(85) 할매네 영감님은 그 중 힘이 좋은 이 마을 힘꾼이었다.

“저 나무가 생것일 때는 얼매나 무거왔겄어. 근디 우리 영감이 혼차 지고 내려왔어. 그 무거운 것을 짊어져서 후딱 죽었는갑다 했어.”

동량감으로 점찍은 내동산 소나무는 동네 장정 몇 명이 힘을 모아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무거웠지만, 이태옥 할아버지는 혼자 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내려왔다.

“우리 마을에 목수가 서이 있었어. 그 냥반들이 몸소 희생을 히감서 지었어. 삯도 안받고 지어줬어.”

남자들은 나무 나르고 흙 나르고 여자들은 밥 나르고 술 나르고 온 동네 사람들이 울력을 했다.

“우리는 칠월칠석날이 모정 생일이여”

“나 어릴 직에 열 다섯 살 때여. 올해로 67년차여.”

임병권(82) 할아버지는 상량을 얹었던 그날을 소상히 기억한다.

“신묘년(1951년) 칠월칠석날이었어. 우리는 칠월칠석날이 모정 생일이여. 칠석날을 젤로 큰 행사로 알아. 반드시 싹 다 모여서 술 한잔썩 혀야제 그냥 넘어가들 못해. 논에 풀 다 매고 한더위에 잠꽌 쉬어가는 술멕이를 모정 생일날 허는 거여. 전에는 굿도 치고 아조 걸게 놀았어.”

올해는 윤달이 들어서 “당거서 한잔썩” 먹고 쉬었다가 농삿일하자고 모정 생일을 중복날인 7월22일로 앞당겼다.

상량을 쓴 이는 봉우네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동네에 서당이 있었고 소산 선생에게 글을 배운 동네 남자들이 붓글씨를 솔찬히 쓰고 문자속이 깊었다.

‘서근래산(西近萊山) 동회선각(東回仙閣) 은폭세류(銀暴細流) 함외무진(檻外無盡)’이라고 적은 상량문을 김재현(71) 할아버지가 풀어 주신다.

“서쪽으로는 내동산이 가깝고, 동쪽으로는 선각산이 돌아오고, 은빛 폭포가 가늘게 흘러서 세류하야, 모정 난간 바깥으로 끝없이 흘러간다 그 뜻이라. 내동산에 폭포가 있는디 옛날에는 땀띠에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각처에서 와서 물을 맞고 갔어. 그리고 여가 섬진강 최상류라 여그 물이 하동 쪽으로 흘러가는 거라 그 말이여.”

첫 해에는 지붕을 밀대로 이었다.

“짓고 보니 여름이라 지붕을 엉글라니 짚이 귀해. 밀대로 마람을 짜갖고 올렸어.”

 

▲ 대들보 올린 해와 달과 시를 적은 상량문. 신묘년 칠월칠석 날이 이 모정의 생일이다. 상량문 좌우 양 끝에 물의 신인 '龍(용)'과 '龜(거북)'을 마주 대하도록 써서 화재를 막고자 하였다.
▲ '서근래산 동회선각 온폭세류 함외무진' 이라고 적은 상량문. 동네에 서당이 있어서 동네 남자들이 붓글씨를 솔찬히 쓰고 문자속이 깊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할’ 모정

초가를 얹다가 나중에 양철로 개량된 모정은 마을 사람들이 지성으로 어루만지고 보듬아 온 덕분에 처음 지었을 적 순정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모정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늙어졌다.

“모정이 노프막헌 언덕에 있어서 인자 모두 노인들이 되셔 놓으니 뽁뽁 기어올라오느라 힘들어요. 걸음 편한 자리에 있으문 좋을 것인디.”

신묘생으로 모정과 생년이 같다는 김길현(68) 이장의 안타까움이다.

“모정이 늙어서 못쓰겄소 허고 뽀끄레인으로 허물어 불문 굵은 지둥에 지와지붕으로 신형으로 착 지서줄 것인디.”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이 ‘귀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깝다.

“인자 요런 것은 돈으로도 못 지서. 요런 것이 문화재여”라는 주장에 고개 끄덕끄덕 하다가도 숨차게 올라온 모정에 흙덩이 버스러져 떨어질 적마다 “아 밀어불잔께” 하는 강경한 목소리가 높아지곤 하니, 신묘생 모정의 앞날이 위태위태하다.

원래 있던 것을 잘 건사하는 데는 지원이 따르지 않고 ‘없어야 지원한다’는 지자체의 행정 원칙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할’ 가치 있는 모정들을 자꾸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동네 유서 깊고 내력 깊은 모정들이 ‘낡고 헌것’으로만 치부돼 자꾸 허물어져 가고 자취없어져 간다.

모정에는 나이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안쪽으로 앙그시고 그 앞으로 아버지들이 자리하시고 그 옆으로 째깐허니 칸을 살짝 막았어. 젊은 사람들 핀허게 담배 피라고 배려헌 것이제. 그 앞으로는 지앙스런 머이마들, 아버지들 앞에는 가이나들.”

그리 넓지 않은 모정을 동네 남녀노소가 살뜰하니 나눠서 ‘따로 또 같이’ 한데 복작복작 모태어 쉬고 놀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여자들은 모정에 올라서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내외를 했어.”

이금순(82) 할매는 서방님 또래들만 도래도래 있을 적에 서방님 따라 올라가서 모정에 잠깐 앉아보았었노라 한다.

“만날 남자들만 꽉 차 있어. 그때는 어른들이 ‘양반’ 찾던 때여. 모정에 놀러가문 아무집 며느리 못쓴다고 숭나서 저테 가도 못해.”

모정에서 놀 수도 없었지만 놀 새도 없었다. “여름으로는 밭 매야지 삼베 질쌈해야지 그놈 비어서 꾸메서 풀히야지 데리야지 불 때서 밥해야지 애기들 키와야지.”

옷에 흙 털 새 없고 손에 물 마를 새 없던 각시들한테 모정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 같은 휴양처였다.

“상여 위에서 쉬고 상여 위에서 놀고”

지금은 열 일곱 가구로 쫄아든 동네지만 스물 대여섯 가구가 살던 시절 모정은 빡빡했다. 여름날엔 옥수수 쪄온 소쿠리가 곧잘 등장했고 마루 밑으로는 옥수수 깡치가 즐비했다. 마루에 그려놓은 고누판에서 고누를 하다가 모정 대들보 위로 넘어다니곤 하던 지앙스런 머이매들이지만 모정 앞 나무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동네 개바위도 올라타서는 안되는 걸로 알았다. 어른들 말씀대로 호랭이가 물어가는 줄 알았다.

“전에는 텔레비가 있어 선풍기가 있어. 이런 디 나와야 사람도 보고 얘기도 듣지. 그러니 무조건 밥 먹으문 나와. 더우문 아주 박신박신했지.”

동산마을 모정 마루 아래엔 특이하게도 늘 상여가 놓여있었다. 세월 지나 시방은 해체되어 나무 무더기로 남아있다. 이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상여를 멘 것은 20년 전쯤 일이다.

“우리 아부지 돌아가시고 아부지 친구들이 오셔서 상여를 멨어요. 그것은 동네 쪽팔릴 일이다 싶더라고. 동네에서 초상이 나문 젊은 우리가 조문허러 와서 상여만은 메드리고 가자 그리 약속을 했어. 그러고 나서 가신 분이 김안선이 아부지여. 근디 젊은 사람들이라 언제 상여를 메 봤어야지. 발도 안 맞고 소리도 안 맞고. ‘안선이 아부지가 겁나게 욕허겄다, 아 이것들이 발도 못 맞추냐 허시겄다’ 했지. 그날 상여 메고 끝이었어요.” 최홍렬(55)씨의 회상이다.

“생각해 보문 우리가 상여 위에서 쉬고 상여 위에서 놀고 그런 거여. 그런게 이 동네가 명이 긴갑다고 우리끼리 그리 말허지.”

상여를 곁에 두고 죽음을 삶 곁에 두고, 일하다가 놀다가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천연스럽게 흔연스럽게 살아온 마을이다.

“우리 여자들은 여그 와서 논 지 얼마 안되야. 살다 본께 이런 존 시상이 왔어.” 끄트머리까지 와 봤더니 좋은 세상에 당도하였노라 한다. 잠시 일을 놓고 다만 모정에 앉아 맞는 한 줄기 바람만으로도 ‘전에 어매들은 못 살아본 좋은 시상’이라고, 어매는 생의 어느 순간을 그리 치하하는 것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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