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느린 음악, 가곡을 배우다

<가톨릭일꾼> 최충언 칼럼 최충언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1.07 13:13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일상의 굴렁쇠를 굴리며 살아간다. 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효율과 생산성을 다그치는 직장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소외노동에 지치기 일쑤다. 진영논리, 갑을관계, 남녀구분, 세대차이로 편을 가르는 일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옛 선비들은 유흥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마음 수양의 한 방법으로 음악이 권장되었다. 선비들은 혼자서 명상하듯 거문고를 연주했고, 자신들의 풍류모임에 연주자와 가인들을 초청해 함께 어울리면서 독특한 ‘풍류방 문화’를 만들었다. 전통사회의 선비들은 틈틈이 음악을 배우고 즐기면서 마음의 평정과 바름을 추구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음악은 ‘기뻐도 흘러넘치지 않으며, 슬퍼도 비통에 이르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드러낸다."(송혜진, 꿈꾸는 거문고 중에서)

<가곡전수관>에 다닌 지도 이태가 되어간다. 퇴근 후에 매주 화, 수요일에 마산가는 버스를 탄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강의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 가야한다. 천성이 게으른 내가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대견하다. 출퇴근 시간에 유튜브로 가곡과 거문고 가락을 들으며 다니는 것이 즐겁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곡 배우러 다닌다고 말하면, 열에 열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도 배우러 다녀요?” ‘내 고향 남쪽바다’ 같은 한국가곡을 배우러 다니는 줄 안다.

 

▲ 사진=최충언

조순자 명인, 어머니 같은

가곡은 왕조시대에 선비들의 풍류방에서 즐겨 불리던 전문 성악가의 노래다. 시조라고 하는 정형시를 기악 반주에 맞춰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전승, 보전되고 있으며, 2010년도에 유네스코 세계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것도 권고등재다. 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글픈 현실이다.

아내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조순자 명인이 노래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가곡을 배우게 되었다. <가곡전수관>에서는 ‘영송헌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가곡과 영제시조를 가르치고 있다. ‘토요풍류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전통예술인 가무악과 가곡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가르치는데 역시 무료로 운영한다.

일흔이 넘은 조순자 명인은 우리 부부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선생님의 강의는 한마디로 노래를 통한 인문학 강좌다. 50년 넘게 노래를 부르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가곡 속에는 대단히 좋은 철학이 들어있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이기도 한 홍익정신입니다. 사람만이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정신이 들어있어요. 문화는 공생하고 상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가장 좋은 전달 수단은 바로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음악이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가곡을 하라.” 조순자 명인의 말씀이다. 가곡 같은 느린 음악은 인간 본연의 심성을 회복하게 하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이로울 수 있도록 한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가곡’이다.

 

▲ 사진=최충언

가곡, 느린 폐장의 음악

가곡은 약 45음절 내외의 시를 미리 정해진 40여곡의 틀에 맞추어 부르는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으로 5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반주악기가 전주곡인 다스름이나 대여음을 연주하면 이어서 초장, 이장, 삼장을 노래하고 간주곡인 중여음을 연주한 후 나머지 사장, 오장을 노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현전하는 가곡은 각기 속도가 다른 41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창가곡은 우조 가곡과 계면조 가곡을 포함하여 26곡이고, 여창가곡은 우조 가곡과 계면조 가곡 15곡으로 되어 있다. 가곡 공연에서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남자 가객과 여자 가객이 번갈아 가며 연이어 부르다가 맨 마지막 순서에서는 남녀 가객이 함께 부르는 지정곡(태평가)으로 마무리하는 전통이 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 김수장의 <해동가요>(1769), 박효관과 안민영의 <가곡원류>(1876)는 우리나라 3대 가집이다. 이 노래책에서 전하는 가곡은 굉장히 느린 음악이다. 가곡의 여러 곡 중에서 가장 느린 곡은 이삭대엽이다. 1분 20정, 1박이 3초에 해당하여 서양음악의 메트로놈에서 가장 느린 빠르기보다 2배나 느린 빠르기다.

음악적 빠르기의 입장에서 우리의 음악은 폐장의 음악이요, 서양음악은 심장의 음악이다. 맥박 1회의 빠르기가 기준이 된 서양음악과 한 숨이 빠르기의 기준이 된 우리음악은 동일한 척도로 가늠할 수 없는 각자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대인의 삶은 속도 전쟁을 치른다. 느림의 미학을 구현한 가곡은 속도에 묻혀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느림’을 통해 현재의 시간과 공간, 전통의 미덕과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대해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해주는 음악이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감정을 절제한 느린 음악을 이상으로 삼았다. 느리고 한가하면 마음이 여유 있고 화하게 된다. 반대로 움직임이 빠르면 마음이 급해지고 바빠지며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쉽게 실수하게 된다. 그래서 산책하는 사람이 빨리 걷는 경우가 드물고, 흥분했을 때 천천히 말하는 사람 역시 드물다. 음악의 느림과 빠름도 이러한 효용성을 지닌다고 선인들은 믿었다.
 

여창가곡을 흥얼거리고, 영제시조로 호연지기를 배운다면

지난 해 여름, 독일 뮌헨 성베네딕토회의 상트오틀리엔에 가곡이 울려 퍼졌다. <가곡전수관>이 독일 수도원 선교박물관의 한국관 재개관 기념으로 초청을 받아 우리 선조들이 수 천 년 이어온 전통 가곡의 우수성을 알리고 왔다. 조 명인은 마이크도 없이 성당 안에서 노래를 하였는데도 공명이 너무 잘되어 아주 좋은 공연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곡이 공연되는 한 시간 동안 아주 질 높은 명상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한국 전통가곡과 우리 독일 성당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했다.’ 푸른 눈의 청중들은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이렇게 호응했다고 한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는 뇌파 중에서 알파파가 많이 나타난다. 휴식을 취하거나 눈을 감고 있거나 명상 상태에서 주로 나온다. 가곡이나 느린 음악에서 알파파의 파장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가곡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계급을 뛰어넘어 여흥을 즐겼던 풍류방에서 소통하며 불렸다. 풍류음악의 조건은 느린 속도로 여유를 갖는 것과 부드러운 음색으로 너무 높거나 큰소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오십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가곡과 영제시조와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다. 힘이 있는 남창가곡 몇 곡을 부를 수 있거나 여창가곡을 흥얼거리고, 영제시조로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첫 술에 배가 부르랴만, 느리지만 멋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기본에 충실하게 배우고 싶다.

나무의 빠르고 느린 생장이 서로 어울린 흔적이 바로 나이테이다. 계절에 따라 세포 분열의 속도가 달라 나이테가 생긴다고 한다. 영양이 풍부한 여름에는 많이 자라고 겨울이 오면 성장이 더뎌진다. 그 결과로 동심원의 나이테를 갖게 된다. 느리게 자라는 아이들인 발달장애인들처럼 나무가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느리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지사지로 서로 다투지 말고 더불어 잘 살아가는 데는 느린 노래가 제격인 것 같다.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 자체가 평화다. 이제 곧 겨울이다.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