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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겁(萬劫)의 세월 담긴, 이 곡선의 강이 좋다

<김초록 에세이> 내 마음의 푸른 금강 김초록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1.1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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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변의 겨울 갈대

 

겨울이 찾아온 금강 둑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마을이 그 산에 폭 안겨 있다. 그 옆으로 금강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이다.

공기가 이렇게 상쾌할 수 있다니! 잡념과 근심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다. 바람의 맛이 다르다. 그 맛을 가슴으로 느낀다. 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 한 줌을 마음으로 몸으로 끌어안는다. 포근하고 부드럽다. 빈틈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일상에서 한 발짝만 비켜나면 이런 순수한 자연과 만날 수 있다. 이건 갑자기 주어진 행운이 아니다. 강을 만나기 위해 몇 개월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그 강이 내 앞에 오련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고가는 계절을 느끼기에 강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강은 대개가 산과 들과 마을을 품고 있어 강을 찾게 되면 그 다정다감한 풍경을 온전히 보고 느낄 수 있다. 해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두 시간 남짓 달려온 금강. 저 강이 어떤 강인가. 이 나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젓줄이 아닌가. 곡선으로 열린 저 강의 종착지는 바다이리라. 곡선은 부드럽고 조화롭고 겸손하다. 긴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이 곡선의 금강을 좋아한다.

강과 바다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삶의 근간이다. 세상 물정을 온몸으로 지켜본 산 증인이다. 우리의 땅은 어딜 가나 강이 없는 곳이 없다. 깊은 산골에서 첫걸음을 뗀 물길의 그 지난한 흐름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물길은 마침내 합쳐져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지구가 생겨나면서 물도 생겨났을 것이다. 물의 나이는 대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가늠할 수 없다. 물은 생겨나면서부터 제 갈 길을 훤히 꿰고 있었으리라. 산시냇물이 되었다가 개울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었다가 강이 되었다가 종내는 바다가 된다는 것을. 바다가 되어 하얀 물머리를 일으키며 뭍으로 밀려간다는 것을. 저 풀잎 위에 맺힌 맑은 이슬방울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도 강이다. 강은 물방울들의 집합체이면서 세월의 나이테다.

햇살 곱게 퍼진 강가에 앉으니 마음이 그럴 수 없이 편안하다. 강을 건너온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게 한다. 여기저기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는 들꽃이 애처롭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초겨울 오후의 적요(寂寥)를 즐기고 있다. 솜털 같은 부드러움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겨울 강은 고요하다. 침묵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다. 저 여름 가을의 벅적거림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고요의 한가운데에 앉아 세월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모처럼 찾아온 정적을 선물인양 반갑게 받아들인다. 햇살을 품은 강이 물비늘을 반짝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산을 에돌고 마을을 에돌고 텅 빈 들판을 가로지른다. 문득 마음이 공허해진다. 고독이 밀물처럼 엄습해온다. 그리움도 그 사이에 껴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 감정이 싫지 않은 것은 이 겨울이 주는 묘한 끌림 때문이리라.

 

▲ 여름 금강의 찬란한 풍경

 

이즈음의 대지는 텅 비어 있다. 저 강물조차도 지난여름의 철철 넘쳐흐르던 모습이 아니다.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건 자연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자연이 살아 있다는 건 지구의 미래가 밝다는 뜻이다.

강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도 한 겹 한 겹 옷을 벗듯 벌거숭이로 변하고 있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한다. 다시 찾아올 봄을 위해 몸의 일부분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다. 때가 되면 채우고 비울 줄 아는 식물들의 겸양. 거룩한 자기희생이다. 사람도 저 자연처럼 가진 것의 일부를 내어줄 때 사람다워진다. 소유욕이 지나치면 화를 당하게 된다.

여기는 금강 하구둑이 바라보이는 충남 서천의 한 갈대밭. 허리를 구부리고 비바람과 땡볕에 맞서 싸웠던 갈대 마디에도 겨울이 묻어 있다. 광활한 갈대밭이 생명들의 숨소리로 가득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출렁이고 있다. 갈대밭 옆으로는 도란도란 금강이 흘러가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이어진 강줄기 너머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그 먹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면 강물도 좀 더 맑아질 수 있을까?

갈대와 강은 참 잘 어울린다. 갈대가 없는 강은 쓸쓸하다. 강이 없는 갈대도 뭔가 허전하다. 해서 둘은 사이좋게 붙어 있어야 멋있어 보인다. 사진 속의 갈대와 강을 본 적이 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을 원경(遠景)에 두고, 춤을 추듯 하늘거리는 갈대꽃을 클로즈업한 고화질의 사진은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지인은 신문 지상에 난 이 사진을 보고 구도의 예술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름 내내 청청했을 갈대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가느다란 꽃송이가 잔바람에 떨어질 듯 위태롭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갈대들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요즘 이곳을 찾으면 갈대와 강물과 바람이 연주하는 삼중주 교향악을 들을 수 있다. 귀를 간질이는 서걱거림과 찰랑거림에다 바람 소리가 뒤섞이면 천상의 화음이 따로 없다. 그 어떤 악기가 저 신비한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자연의 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진다.

강물이 산을 넘어온 햇살과 몸을 섞고 있다. 어른키 만큼 자란 갈대도 무언가 얘기를 하려는 듯 몸을 뒤채고 있다. 아직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나무들과 아직 그 고운 모습을 잃지 않은 몇 송이 풀꽃들, 그리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유순한 물길. 그 모습이 그리도 정겨울 수 없다. 자연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고 더 아름답게 다가올 수도 있다. 미적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풍경)을 의미를 가지고 바라볼 때 자연스레 얻어지는 마음의 산물이다.

지난해 초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 갈대는 바람에 울고 있었다. 자르르 자르르,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면서 무언지 모를 속마음을 밖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환청처럼 들리던 소리의 여운이 지금껏 내 마음에 남아 있다.

5년 전 여름으로 기억한다. 서천 춘장대해수욕장에 휴가차 왔다가 들른 갈대밭도 나를 환상의 세계에 젖어들게 했다. 동이 트는 새벽녘이었다. 동쪽으로 아리잠직하게 번지는 빛줄기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갈대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녹색 갈대밭에 황금빛이 섞여들자 마음이 요동쳤던 기억! 참으로 절묘한 색상 대비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참새들이 갈대숲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한순간 바람이 불자 도미노처럼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갈대의 모습에 내 마음은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 금강 발원지인 뜬봉샘

 

우리나라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금강은 만겁(萬劫)의 세월, 질곡(桎梏)의 역사가 만들어낸 삶의 텃밭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이 강물을 끌어들여 논밭을 일구고 멱을 감고 식수로 써왔다. 지난여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더위를 달랬을 것이다. 강 그늘에 앉아 강의 고마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신무산 중턱의 뜬봉샘(북동계곡)에서 발원해 무려 사백 킬로미터가 넘는 곡선 길을 달려 군산 하구둑에서 잠시 맴을 돈 뒤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이름도 거룩한 뜬봉샘으로 가는 길은 울울한 숲과의 동행 길이어서 기분이 상쾌하다. 지난여름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뜬봉샘은 풀숲을 헤치고 한참 올라간 끝머리에 숨은 듯 웅크리고 있었다. 아, 여기가 어딘가. 금강이 시작되는 곳이 아닌가. 경외와 감격이 밀려들었다. 깊은 샘일수록 맑고 차며 물이 넉넉하다 했던가. 샘은 물을 그득하게 담고 있었다. 뜬봉샘을 보고 다시 내려가는 길. 휘르륵 쫑쫑, 맑고 고운 산새 소리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산길 옆으로는 물이 괄괄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 풀꽃들과 코끝에 달라붙는 풀 냄새, 그리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산기운이 발길을 더디게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이랴. 금강의 시원(始原)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완만하게 굽이치며 흐르는 모습이 마치 비단 같다 하여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강(錦江)이라 했다. 금강은 크고 작은 지류 수백 여 개를 품고 있으니 그 긴 물줄기의 면면을 정확히 짚어낼 도리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물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지만 늘 마음뿐이다. 이것은 어쩌면 의지와 실천의 문제일지 모른다. 언젠가 내 몸에 그 의지가 꽉 차는 날, 두 발로 금강 줄기를 따라가 보고 싶다.

골 깊은 바위틈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수없이 많은 돌멩이와 풀섶을 쓰다듬고 도랑과 하천을 지나 마침내 강이 되었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만으로는 금강의 감춰진 실체를 알 수 없다. 금강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 강물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다. 금강은 물길을 따라가며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어서 ‘택리지’에는 적등강(赤登江)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웅진강(熊津江)으로 적고 있다. 또 부여에 이르러서는 백마강(白馬江)이 되고 영동땅 양산에 이르러서는 양강(陽江)이 된다. 여러 이름이 말해주듯 강에 얽힌 사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강을 중심으로 바위와 폭포, 소(沼), 샘이 맞닿아 있으니 거기에 얽힌 수 만 가지 설화도 흥미진진하다.

 

▲ 금강이 만든 갈대밭

 

금강은 이곳 갈대밭 아래 하구둑에서 그 물길을 잠시 멈춘다. 바다가 바로 저긴데, 흐름이 막힌 강물은 다시 흘러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금강 하구둑은 금강 물줄기를 막아 세운 둑이다.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여름철 홍수를 예방하며 바닷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금강 하구둑.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강물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픔이기도 하다. 자연은 가만히 놔둘 때 자연다워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는 순간 생명들은 위태로워진다. 예나 지금이나 강의 순수한 생명력이 멍든 모습은 문명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탁한 강물을 ‘맑게’ 살리는 일은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었다. 생동하는 자연을 영원히 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꿈일 뿐인가.

장수에서 흘러온 금강의 물줄기는 경치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절경들을 만들어놓았다. 무주의 구천동과 영동의 양산팔경(陽山八景)은 금강이 만든 대표적인 명승지이다. 무주구천동은 덕유산의 중심인 향적봉에서 시작해 무주읍을 관통, 금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물빛이 거울처럼 맑은데다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언제나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환경 지표 생물인 반딧불이가 살 만큼 맑고 깨끗한 곳이지만 점차 제 모습을 잃어간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강은 신성한 공간이다. 생명의 뿌리이다. 강이 푸른색을 띤다는 건 맑고 건강하다는 반증이다. 반면 강이 검은 색을 띤다는 건 죽음이다. 우리는 그동안 죽음의 강(하천, 개울)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 이지러진 모습을 지켜보면서 맑고 깨끗한 자연이 왜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물을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으로 여긴 노자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강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젖줄이요 혈관이다. 강은 깊은 산 속의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졌다. 강의 일생은, 어느 날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한평생을 살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일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란만장, 그 자체이다. 한 모금의 물은 몸속의 피를 돌게 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철따라 바뀌는 강변 풍경과는 달리 강물은 언제나 한 모습으로 그 끝을 향해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이 나라는 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강이 있는 곳에 마을이 들어섰고 도시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도로가 뚫렸다. 개발(정비)과 보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오늘날의 강이지만 그 원초적인 생명력만은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한다.

사람은 강에 기대어 살아간다. 강을 떠나서는 생존이 어렵다. 한평생 살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곳도 흙이 아니면 강이다. 한 줌의 재로 강에 뿌려져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태어나고 돌아가는 순환의 원점이다. 강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생명의 텃밭’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강이 건강하면 사람살이도 건강하게 마련이다. 강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무다. 온갖 나무와 꽃들, 새들과 짐승들이 강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과 그리움이 흐르는 강 앞에서 그저 겸허히 옷깃 여밀 뿐이다.

하나 둘 시들어가는 땅 위의 생명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강물이 들려주는 속삭임을 가만히 엿듣는다.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 올해도 다 가는구나. 새끼줄을 당기듯 마음을 다잡아본다. 조급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느끼는 공통된 정서이리라.

금강을 떠나면서 그 고른 숨결을 듣는다. 금강에서 얻은 삶의 에너지를 통장에 저축하듯 몸 안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금강은 내 사색의 공간이다. 금강은 오늘도 주어진 길을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우리네 삶도 저 강물처럼 언제나 유연하게 흘러갔으면 한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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