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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과 함께 사라진 배우 김주혁을 추모함

<가톨릭일꾼> 진수미 문화칼럼 가톨릭일꾼 진수미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1.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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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주혁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여 일 지났다. 그가 주연을 맡았던 <방자전>에 대한 글을 준비하다가 사고 소식을 들었던 터라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화면 안의 그는 건강했고, 죽음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스타들이 왜 신으로 추앙받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스크린 속 그들은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방자전>(2010, 김대우)은 <춘향전>을 방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고전적 절대 사랑의 표상 같은 춘향과 몽룡의 연애담을 주변부 인물 방자가 해체하는, 착상의 기발함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얻은 영화이다. <춘향전>은 입신양명 서사에 신분을 뛰어넘은 로맨스가 결합된 이야기이다. <방자전>은 이러한 <춘향전>의 기본 서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방자전>이 방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춘향전>의 이면에 현실로서 <방자전>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작품은 말한다. <춘향전>이 보여주는 춘향의 행복은 사실 방자의 사랑과 관대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젠더 정치를 배제하고 제기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춘향전>이 여성적 관점에서 비롯된 판타지임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즐겨왔다. 그런데 <방자전>은 그 판타지의 주체가 여성이며, 그것이 남성 관점에서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 영화 '방자전' 스틸컷

 

<방자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춘향전>에서처럼 남원부사의 자제 몽룡(류승범 분)은 퇴기의 딸 춘향(조여정 분)과 사랑을 나누지만, 그것은 욕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춘향 역시 신분 상승의 열망에 불타서 의도적으로 몽룡에게 접근했다. 방자 역시 춘향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상태이며, 마노인(오달수 분)에게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을 전수받는다. 그는 향단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하지만 뛰어난 수영 실력으로 춘향의 마음을 얻게 된다. 이후 몽룡은 서울로 떠나고 방자와 춘향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몽룡은 과거에 급제한 후, 급제 동기인 변학도(송새벽 분)의 말에 힌트를 얻고 향단(류현경 분)의 주막에서 남원의 상황을 파악한 후,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이라는 미담을 실천, 그것을 출세가도의 자원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춘향과 미리 짜고 ‘어사출두!’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는 학도가 남원에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취향을 이용해 춘향을 노리도록 거짓정보를 흘려준다. 계획대로 춘향은 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고 방자는 춘향의 변심을 알면서도 그녀를 돕는다. 결국 춘향과 몽룡은 결혼에 이르고, 방자는 여전히 하인으로 그들의 곁에 있게 된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몽룡은 춘향을 살해하려 한다. 방자가 사건 현장의 근처에 있다가 그녀를 구해내지만 이에 충격을 받은 춘향은 아이의 정신 상태로 퇴행한다.

세월이 흘러 방자는 어둠의 세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그는 이야기꾼을 만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춘향의 바람대로 그녀가 몽룡에게 사랑받았다는 이야기로 각색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춘향전>이라는 것이다.

 

 

<방자전>이 처음 나왔을 때 인물들의 재해석이 흥미로웠다. 파렴치한 양반 몽룡과 변태적 섹스중독자 변학도의 캐릭터 해석이 신선했고 춘향의 집을 떠나 주막집 사장이 된 향단의 스토리도 재기발랄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러한 캐릭터가 어울려 구축된 서사를 곱씹어 보면 실망스럽다. 향단은 성공을 한 후에도 방자에 대한 원망과 춘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학도의 성격과 악행은 몽룡이 그린 ‘빅 픽처’의 도구로만 기능하고 있는 것 같다.

<방자전>의 몽룡과 방자는 뻔뻔한 승자와 점잖은 패자의 캐릭터 구도를 보여준다. 파렴치한 인간성을 가진 몽룡은 춘향의 사랑과 출세를 모두 성취했다. 방자는 이 관계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하인이고, 나아가 한때 행복을 나누었던 연인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춘향에 대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다.

춘향이 실제로 신분 상승 욕구를 지닌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퇴기인 어머니 월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니, 그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을 극복해야 한다는 설정에는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춘향전>의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판단하고 고난을 수용하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대중은 그러한 춘향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사랑해 왔다.

<방자전>의 춘향은 이와 다르다. 그녀는 변화하는 현실에 순응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몽룡이 있을 때는 그를 욕망 실현의 도구로 간주, 게임을 벌인다. 그가 떠나면 방자와 사귀고, 몽룡이 돌아와 계략을 짜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자신이 배반한 방자의 심경을 배려하기는커녕 그를 하인으로 들인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모가 큰 인물이다. 결국 그녀는 몽룡의 살해 기도로 처벌을 받는다.

 

 

<방자전>은 한국 남성의 판타지가 응축된 작품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국의 남성성을 ‘주변적 남성성’이라고 명명한다. 제국주의의 서구 남성이 지배적 남성성을 구현한다면, 그러한 위계에 종속된 남성을 종속적 남성성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이들이 젠더 관계에서 결코 종속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주변적 남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구 남성의 우선 가치는 가부장으로서 여성과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한국 남성에게 여성과 가정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 한국 남성은 ‘남성 자신과 동일시된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며, 여성은 이를 위한 자원으로 취급해 왔다. 1970년대 기지촌 성매매 합법화 정책이 이를 증언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방자전>의 방자는 몽룡의 하인으로 종속적이고 주변적 존재이지만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는 서구의 지배적 남성과 유사하다. 그는 여성을 대상으로 남성성을 강화하고 확장함으로써 주변성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 장애를 가지게 된 춘향을 돌보고 사랑함으로써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나타낸다.

대중 서사물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소망을 대리 충족하는 기능을 한다. <방자전>은 주변성을 지닌 남성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한편, 자신들이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여성관을 극복하는 판타지적 인물로 방자를 재현했다. 이처럼 복합적 내면을 무리 없이 살아있는 인물로 체화한 배우가 김주혁이었다. 그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그에 내장된 강인함으로 주변적 신분의 소유자이면서도 약한 이를 보호할 줄 아는 남성으로 방자를 구현해냈다.

최근 영화계에서는 김주혁의 강인한 카리스마가 로맨스의 외피 없이도 뿜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공조>(2017, 김성훈)의 차기성을 통해 확인했었다. 그의 연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시점에 우리 곁을 떠난 그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그의 명복을 빈다.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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