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백이는 고창군 심원면에서 선운사로 가는 길 옆 마을에 산다. 이백이는 경운기에 관한 한 자신이 최고의 전문가라고 큰소리 빵빵 치지만, 한 달이면 적어도 두 번은 고랑창에 경운기를 처박아놓고 큰일 났다고 엉엉 울어대며 경운기 센터나 119에 전화를 해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품팔이가 직업인 그는 경운기를 끌고 가면 일당으로 2만원을 더 받기 때문에 경운기가 필요 없는 일에도 굳이 경운기를 끌고 가서 주인을 난감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하루라도 일을 못 나가게 되면 하루만큼 인생을 손해 봤다고 온 종일 동네를 쏘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경운기가 추락했던 장소

 

어쩌면 이백이의 언행 하나하나가 다 특이하고 창조적이어서 숨소리까지도 남다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해도 뭐 그리 큰 과장은 아닌 이백이, 그는 사실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다.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나가서 일당을 받는 것이지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보다 부자가 되겠다는 오직 그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아버지보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이백이의 그 일관된 소원의 본질은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부자 그 자체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를 이기는 것이다. 결투를 할 수만 있다면 아마 결투를 해서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도전적인 발언을 못 한다. 아버지가 꾸중을 하시면 그냥 듣기만 하고, 그리고 아버지가 눈앞에서 멀어지면,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를 성토하고 탄핵하는 일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나보다 다섯 살만 더 먹었어도 말이지, 내가 아버지한테 이런 꼴을 당하겠냐고. 아 그런데 스물다섯 살이나 더 처먹어버렸단 말이요.”

아버지가 아들보다 이십오 년이나 먼저 태어났고, 그래서 이십오 년만큼 힘이 더 센 탓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억울해 하는 이백이를 동네 사람들은 가끔 삼백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오백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백이는 이백이의 아버지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백 살까지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기억지만, 정작 이백이 아버지 자신은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겠느냐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결혼 십삼 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그 기념으로 돼지 한 마리와 닭 스무 마리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인 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일치한다.

경운기를 새로 산 것도 아들을 낳은 기념이었다. 아들까지 낳았는데 낡아빠진 경운기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고, 농협에 빚까지 져가면서 경운기를 새로 들여놓던 날 아버지는 그 기념으로 아들과 함께 시운전에 나섰다. 막걸리도 몇 사발 기분 좋게 들이키고, 이제 한참 말을 배우는 시기의 아들을 옆에 태우고 동네 앞 논두렁길을 그야말로 신나게 달렸다.

 

▲ 오래된 우물

 

 

취흥이 도도한 데다 아빠, 아빠 하고 귀엽게 끊임없이 불러주며 까르르깔깔 웃어주는 아들까지 옆에 있고 보니 돌연 호연지기가 솟았던 모양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너무도 익숙한 노래를 큰소리로 불러대며 이곳저곳, 여기저기, 아무 데나 마구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하던 경운기는 어느 순간 밟아서는 안 될 땅을 밟고 말았다. 어어, 할 사이도 없이 경운기는 뿌지직, 소리와 함께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사람도 거의 안 다니는 저수지 아래 오래 된 나무다리 위를 경운기 머리가 지나가는 순간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니어서, 경운기는 대번에 굴러 떨어지지 않고 뒷바퀴가 부러진 다리에 걸린 채로 버티는 아슬아슬한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찰나라고나 말해야 할 그 순간적인 시간 동안 이백이 아버지는 생각을 했고, 판단을 했고, 이백이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려서 제방 위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은 경운기와 함께 최종적으로 추락했다.

경운기와 함께 굴러 떨어진 이백이 아버지는 두 달도 넘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떨어지는 순간 제방 위로 던짐을 당한 이백이는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 한 것이라고 이백이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랑을 했지만, 자랑은 일 년이 채 못 돼서부터 한탄이 되어갔다.

그렇게도 똘망하고, 그렇게도 초롱한 눈빛을 가졌던 이백이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도 아니고 조금씩, 천천히, 전혀 눈치도 못 차리게 사라져 간 까닭으로 이백이 아버지의 기막힘은 더욱 깊었다. 눈을 뜨면 초점이 없이 흐릿하기만 해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저 아이가 내 아들 이백이란 말인가. 입을 열어 말을 하면 혀가 마치 서너 조각으로 갈라진 것처럼 이해 불능의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침을 질질 흘리며 헤죽헤죽 웃어대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서 병아리를 쫓아다니고, 달아나는 병아리의 삐약거리는 소리가 싫다고 기어이 짓밟아 죽여 놓고는 다시 침을 질질 흘리며 헤죽헤죽 웃어대는 저 아이가 진정 내 아들이란 말인가.

마을 아이들은 차츰 이백이를 바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그러면 못 쓴다고 아이들을 타이르면서도 이웃 간의 대화에서는 부지불식간에 바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고, 아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버지의 경망한 처신이라는 등의 진단을 내리고 있기도 했다.

졸지에 ‘경망한 아비’가 돼버린 이백이 아버지는 좋아하던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이웃과의 왕래마저 끊고 경운기는 길가에 처박아둔 채로 이 병원, 저 병원, 전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거의 모든 병원을 찾아다녔다. 아들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백이 아버지의 그런 절박한 결기는 그러나 별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 쓰지 않는 경운기

 

순식간에 십 년 세월이 흐르고, 이십 년도 흘러 이백이의 나이 또한 서른 살이 넘었다. 이때부터 이백이 아버지는 병원 순례를 중단하고 아들의 아내를 구하기 시작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어서 빨리 결혼이라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마음에 차는 며느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장애인은 장애자와 짝을 맺어야 한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한 이백이 아버지는 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신부를 전문적으로 데려다주는 알선업자에 따르면 돈이 뭐 그렇게 많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논 세 마지기를 팔아서 돈을 만들어놓고 기다린 지 한 달도 채 안 돼서 신부 후보가 나타났다.

필리핀 국적으로, 필리핀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공부까지 하다가 중단했다고 하는 며느리를 이백이 아버지는 너무도 마음에 들어 했다. 똑똑한 며느리가 바보 소리 듣는 아들의 모자람을 보완해 줄 것이란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인이면서도 어쩐지 외국인 같지가 않은 느낌이 우선 좋았다. 게다가 한국말도 제법 잘 했다. 서툰 발음으로 아버님, 하고 불러줄 때의 그 목소리와 표정은 서너 살쯤의 아이처럼 귀엽기까지 해서 그만 칵 깨물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백이는 아내의 그런 말투를 매우 싫어했다. 아이도 아닌 것이 아이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이 싫고, 징그럽고, 심지어는 무섭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낯설어서 그런 것이려니 여기고 대수롭잖게 넘어가고자 했지만, 이백이 본인에게는 결코 대수롭잖은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밥을 먹다가도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기를 되풀이하던 이백이는 기어이 아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아무 것이나 물건을 집어 던져서 아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식의 구타행위는 차츰 손으로 직접 가격해서 코피를 흘리게 하고, 급기야는 낫을 들고 찍어 죽인다고 외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살고 싶다고, 살아야 한다고, 좀 더 잘살아보자고 한국으로 왔는데 그 생각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고 호소하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이때의 며느리는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딸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쩌랴.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봄을 기다리는 경운기

 

아들의 행복 못지않게 딸의 불행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백이 아버지의 과감한 결단으로 이백이는 다시 아내 없는 남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끝없는 욕지거리와 호령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그냥 “야 이놈아” 정도였던 아버지의 욕지거리는 차츰 “야 인마”를 거치고 “야 이 새끼야”를 거쳐 “야이 잡놈의 새끼야”로 거칠어져 갔고, 호령소리도 처음에는 남들이 들을새라 집안에서만 터져 나왔지만 차츰 누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아무 데서나 마구 터져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비가 어찌 저리도 모질게 사리분별도 잘 못하는 아들을 닦달질하느냐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백이 아버지의 아들을 대하는 자세는 날로 달로 엄격해져 갈 뿐이었다. 심지어는 밥 먹는 것도 아깝다는 투의 매우 모욕적인 발언까지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아들이 눈앞에 안 보이면 아들이 일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일을 그따위로 하는 개새끼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며 아들의 경운기를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이백이는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고 욕하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대들지는 않았다. 대들기는커녕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저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눈앞에 안 보이면 듣는 사람이 섬뜩할 정도의 욕지거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칼을 갈고 있었다. 복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복수의 방식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힘으로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이십오 년이나 더 살아서 이십오 년만큼 힘이 더 센 아버지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이백이는 밤마다 여기저기에 전화를 건다. 다음 날 일거리가 있어도 전화를 걸고 없어도 전화를 건다. 다음날 일거리가 없을 때는 일거리를 달라고 전화를 걸고, 없을 때는 그 다음날 일거리를 미리 따내기 위해 전화를 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서너 개의 일거리를 한꺼번에 얻어놓고 좋아라 하다가 문득 정신이 차리고는 “내 몸이 왜 하나밖에 없는 것”이냐고 어머니를 상대로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러면 즉각 아버지의 호령소리와 욕지거리가 날아온다.

“아이고, 그냥 내 아들 마음이 이쁘다, 하고 봐주면 될 것을, 어쩌자고 그렇게 시시콜콜 다 아는 체를 하는지 모르겠당게?”

 

▲ 그래도 태양은 뜬다.

 

이백이 어머니는 남편이 무서워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속으로 한숨이나 쉬다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나 겨우 그런 말을 중얼거린다. 돌이켜 생각하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 년 이 년도 아닌 수십 년이었다. 수십 년 동안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아들 문제 하나에 매달려서 환갑 진갑 다 보내고, 어느새 칠순도 보내버리고 마침내 팔순이 되던 날 아침, 이백이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취미가 아니고, 자랑거리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네. 내가 취미생활 하듯이 저놈을 품에 안고만 돈다면, 저놈은 필경 자기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고, 내가 이제 곧 죽을 텐데 죽고 나면, 저놈은 필경 인간 구실을 못하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박이나 받을 텐데, 그런 꼴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데도 내가 나 편하자고 그냥 죽을 날이나 기다리고 있어서야 될 것인가?”

“아 그려, 그것이 또 그렇만이라우 잉?”

가족 친척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느닷없는 주제 앞에서 일단 말문이 막히고 만 것이었다. 글쎄,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들의 장애를 그냥 껴안기만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해서 미리미리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마을 앞 거리에는 이백이 아버지의 경운기가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쓴 채로 녹슬어 가고, 다른 한쪽 밭두렁에서는 부자 되기가 소망인 이백이의 경운기가 봄을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이백이는 일거리가 없는 겨울이 심심해서 안절부절 못해 한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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