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야기> ‘신촌극장’ 홍상표의 <백색분자>를 보고

술집 간판들과 전단지들로 얼룩진 신촌의 구석에는 조그맣게 ‘신촌극장’ 간판이 후미진 골목을 밝히고 있다. 이곳은 다양한 공연예술가, 연극인, 영화인들이 다양한 예술 공연과 일요 단편영화 상영회, 연극 상영 등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곳이다.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공간은 벌써 자신만의 특수성으로 신촌이라는 전형적인 장소에서 살아남고 있다. 전시 및 공연의 좌석 수는 장소의 협소함으로 인해 관객에 비하여 부족한 경우가 많지만, 옛날의 신촌을 향유하게끔 하는 장소와 공연은 여전히 강력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확실히 신촌극장이라는 공간은 젊고 특별하다.

필자가 이 공간을 찾아간 지는 겨우 두어 달, 공연을 본 것도 두세 번에 불과하다. 우연히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전진모 극장장님, 김선민 마케팀장님, 김성우 프로듀서님을 만나 뵙고 인터뷰를 하면서 이 공간과 신촌이라는 장소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수리 다방에 앉아 자연스레 필자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피터팬을 꿈꾸는 사람들 같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구성하는 공간이 더욱 젊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는 점 또한 직접적으로 느껴져 왔다. 과거 몇 십 년 전 소극장들과 다양한 문화 공간이 있어 문화 예술적 역동이 눈에 뚜렷하게 보이던 그때의 기억을 그들은 다시 신촌의 사람들과 함께 향유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만나고 나니 당연히 신촌 극장이라는 공간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공연을 몇 번 찾아본 것이 겨우 두어 달 정도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을 어떻게 글로 풀어 쓸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정답은 극장장님, 운영진과 나눈 대화와 인터뷰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간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또는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의 물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간이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결국 매 주마다 진행되는 공연과 전시, 상영회, 연극 등이 더 신촌극장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것이고, 필자는 그 의미를 나누어 향유하는 것이 그 공간의 특수성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길고 긴 인터뷰는 묻어두고자 한다. 과거를 다시 상기하는 피터팬적인 역동성만을 가슴에 새겨두고,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신촌극장을 들러라. 그곳에서 공연과 다양한 시도들을 구경하고 그곳에서의 그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그곳을 즐기면 된다. 그런 누구도 젊고 특별해질 수 있다. 공간이 갖는 특수성처럼, 우리는 그곳을 즐기고 빠져나오는 순간 특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홍상표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 <백색분자>를 감상하고 쓴 리뷰다. 신촌극장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벌여지는 공연들 앞에서 우리는 솔직해지자. 오직 공연만을 위해 쓴 리뷰를 읽으며 그 공간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연을 위한 글이 난해하고 어렵다면 그 궁금증을 풀려고 공간을 직접 방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이곳엔 오직 작품과 글만이 있을 뿐이다. 홍상표 작가는 이렇게 도입 글을 썼다. “여기 한 탈북자가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열네 살에 한국으로 와야 했던 그녀의 유년시절은 나와 닮아있었다. 나와 다르지 않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우리 사회 안의 나를 말하고 싶다. <백색분자>는 그녀와의 인터뷰를, 내 몸의 움직임과 함께 구성한 작업이다.” 이것이 공연을 보기 전 마지막 열쇠라면,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신촌극장(facebook.com/theatresinchon)
 

몸의 언어

몸에는 몸의 언어가 산산조각 나 박혀있다. 그것은 온몸의 구멍마다 가만히 박혀있기도 하고, 때로는 넘쳐서 흘러내리기도 한다. 몸의 언어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언어, 기호화되어 있고 체계화되어 있는 언어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몸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다. 몸의 언어는 발산하는 언어이고, 미리 생각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세계만이 몸의 언어를 가로막을 수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우리가 움직일 때, 언어는 그 장막에 가로막혀 메아리치게 된다.

대야 속에 들어간 태아는 그렇게 자신의 소리를 메아리쳐서 듣는다. 텍스트는 어느 순간부터 몸의 언어로 뒤바뀐다. 기호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몸의 언어로. 대야에 가로막힌 채로 서사를 모조리 포기한 몸의 언어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그녀’의 세계는 비좁고 텍스트는 길다. 텍스트를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말소리로 직접 바꾸어 내기에, 작가의 호흡부터 몸의 꿈틀거림까지 느낄 수가 있다. 태아의 그 미세한 꿈틀거림처럼, 작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외친다. 그것은 ‘그녀’의 살아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난관과 시련이 겹겹이 겹친 ‘그녀’의 역사가 아니라, 오롯이 남아있는 ‘그녀’의 살아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태어난 태아의 몸에서 몸의 언어가 종말했음을 선고한다. 언어는 대야가 뒤집힌 순간부터 발산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오직 몸만이 남는다. ‘백색분자’는 오직 몸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다. 하얗게 변해가는 살, 수많은 굴레를 뜯어내고, 그것들이 가득 뭉친 차가운 돌덩어리만이 남는다. 돌은 무겁다. 우리의 몸은 무겁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씻는다. 향기 가득한 물, 따뜻하게 데운 물로 우리는 우리만의 신성한 의식을 치른다. 어느 곳에도 몸의 언어는 발생하지 않는다. 몸의 언어는 죽었다.

‘그’와 ‘그녀’ 역시도 죽음의 길로 나선다. ‘그녀’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분신인 작가, ‘그’, 또한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의 성기가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때, 살아있던 ‘그녀’는 죽었다. 우리가 ‘그녀’를 죽였다. 몸의 언어를 끝까지 알아듣지 못한 우리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다. 우리는 대야 속의 태아를 무참히 죽였고, 태아가 살리고자 한 언어를 죽였으며, 마지막 남은 ‘백색분자’를 죽였다. 피부는 하얗게 칠해도 결국엔 피부색이다. 죽음이 만연한 양동이와 대야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말았는가.

객석에 앉아있던 나의 온몸에는 이름 모를 몸의 언어가 산산조각 나 박혀있었다. 내 팔꿈치와 사타구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몸의 언어를 닦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극장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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