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김경집 칼럼

EBS TV의 ‘까칠남녀’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패널 가운데 한 사람인 은하선 씨가 하차했다. 형식은 하차지만 실제로는 퇴출이다. 이른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잰더)로 일컬어지는 성소수자 특집이 방송되자 혐오와 저주를 입에 담으며 방송국에 몰려가 시위하는 세력들에 굴복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강제로 하차시켰다. 이른바 성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마련한다는 대담한 의도는 사라지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강자 이데올로기에 충실한지 새삼 보여줬을 뿐이다. 성소수자들이 과연 사회를 병들게 하고 타락을 일삼는 사람들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명분으로 에이즈(후천선면역결핍증)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에이즈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괜찮았다는 말인가? 참으로 유치한 논거에 불과하다. 이제는 에이즈가 꼭 동성애자들에 의한 것도 아닐뿐더러 그 치료 백신이 개발되며, 그걸 들먹이는 사람들은 줄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그러나 정확한 사실 근거가 아니라 심리적 혹은 문화적 근거 등을 들이대며 억압한다. 설령 그들의 말이 타당하다 하더라도 과연 다른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나의 그것들을 토대로 판단하고 심지어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차별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어야 한다. 차별 그 자체가 야만이고 폭력이다.

나의 일은 아니어서?

▲ 이안 감독의 영화 ‘결혼 피로연’

오래 전 봤던 영화 <결혼피로연>이 새삼 떠오른다. 리안 감독의 이 영화는 뉴욕에 사는 젊은 대만인이 주인공이다. 주인공 웨이퉁은 뉴욕에서 부동산 딜러로 일하고 있으며 물리치료사인 남자친구 사이먼과 아파트에서 동거하고 있는데 타이완에 있는 부모는 계속해서 결혼에 대한 압력을 가하고 때마침 자신이 관리하는 건물에 세 살고 있으며 영주권이 필요한 중국인 화가웨이웨이와 결혼하기로 한다. 타이완의 부모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 아버지는 타이완의 전통혼례식을 제안했고 어쩔 수 없이 결혼피로연까지 치르게 된다.

서양인답지 않게 싹싹한 아들의 친구(사실은 동거하는 남자친구)에 대한 호감 등 부모는 아들이 미국에서 잘 살고 있구나 싶어 안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이 결혼까지 함으로써 자신들의 바람이 다 이뤄지고 있으니 행복만이 그들의 몫이었다. 세 사람의 완벽한 연기로 위장결혼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결혼 피로연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게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이 그는 예비역 장성이었다. 장군은 남성성의 상징이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게이였다는 것,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얼마나 괘씸하고 충격을 받았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쯤에 이르면 아버지는 쓸쓸히 혼자 남아 깊은 상념에 잠긴다.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건 상상도 못했던 아버지. 분노와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이 단지 게이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아들이 안쓰러웠다. 그런 아들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 아비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아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아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는 외면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내 자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부모가 겪을 충격과 배신감(?)도 공감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은 동성애에 대한 여태까지의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원망스러워지는 반전의 장면이었다. 영화는 중산층에 관한 풍자를 다루되 비판의 눈이 아니라 따뜻함과 관용의 시선을 통해 겉으로는 자유를 마음껏 외치는 이성애자들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반전을 담고 있다.

동성애를 비롯한 이른바 성소자의 선택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따위의 논쟁은 차치하고, 특히 근거도 어설프고 견강부회만 드러내며 종교적 경전을 여전히 과거의 시선으로만 해석하려는 종교의 입장은 유보하고 만약 내 가족의 한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충격적이고 배신감을 느낄 것이며 남들 알까봐 전전긍긍할 것이다. 비난의 손가락질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런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모든 선택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최초의 본격적 컴퓨터인 ‘에니그마’의 창시자인 앨런 튜링은 동성애자였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 승리, 혹은 최소한 더 이상의 인류 살상을 막은 큰 몫은 바로 독일군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종전을 앞당긴 에니그마와 튜링의 몫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속 기소했고 법원은 화학적 거세를 선고했다. 그 폭력성에 절망한 튜링은 스스로 독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지금 그런 이유로 기소하거나 화학적 거세를 선고하는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어떠한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LGBT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 사진출처=pixabay.com

정체성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

어느 누구도 다른 이에게 정체성을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폭력이고 야만이다. 그런데 다수의 이데올로기라는 틀에 갇히면 거침없이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정의를 수호하는 선봉인 듯 착각한다. 심지어 ‘성평등’조차 ‘양성평등’으로 바꿔야 하며 ‘차별금지법’도 거부해야 한다고 선동한다. 앞서 말한 ‘까칠남녀 LGBT특집’을 시청한 뒤 올린 후기를 보면 놀랍게도 젊은이들조차 악의적인 비난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쓰레기 같은 ‘젠더 어젠다’에 함몰되어 자신들의 논리를 세뇌시키는 악마적 방송이라고 비난한다. 심지어 차별금지법은 정상인(이 용어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 개념인지 알고 쓰는 건지도 모르면서)을 역차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입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외국에서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에게 당당히 표를 얻어 당선되기도 한다. 그런 나라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사회인가? 다수의 횡포는 비단 다수결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는 감춰진 진실 혹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최대한 시간을 끈다. 그러나 그것은 불편의 저항이 아니라 자신이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과정이다. 그러니 목숨 걸고 비난하고 저항할 문제가 아니다.

서양에서도 같은 동성애에 대해서조차 그 반응이 달랐다. 동성애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대함을 받았던 동성애는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사실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도 지고지순한 ‘정신적인 사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사랑한 미소년에게 보낸 연애감정-고대 그리스인들은 여자들은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성과 에로스’를 교환할 수 있는 건 남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에서 기인한 것이다. 굳이 요즘 식으로 따지자면 플라토닉 러브도 호모섹슈얼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뛰어난 시인 사포가 남성의 폭력성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과 어울린 여자들을 비난한 것(레즈비언이라는 말은 사포의 고향 ‘레스보스 섬’에서 비롯되었다)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의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나 <프리스트>뿐 아니라 <해피투게더>, <토탈 이클립스>, <브로크백 마운틴>, <패왕별희>나 <왕의 남자> 등은 은유로 혹은 노골적으로 남자동성애를 담고 있다. 그런 영화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미 게이컬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눈감아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동성애에 대해서는 차갑다. <델마와 루이스> 정도가 기껏 그나마 은유적으로 묘사한 여자동성애를 함축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사실만으로도 그 비균형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일찍이 뛰어난 테니스 선수였던 나브로틸로바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고백했을 때 사람들이 보여줬던 냉대와 비판은 아직도 사회가 여성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권력을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선택, 특히 정체성의 선택에 대해 비난하거나 억압할 권리는 없다. 더구나 그들이 소수자로서 이미 사회로부터 많은 고통을 강요받았고 감내했다는 것만으로 반인권적인 일이다. 그들이 커밍아웃한 이후에도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도덕적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 것은 일종의 이중처벌일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벗어난 과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논리로 다수의 영향력을 결속시키는 전략으로 편을 가르고 억압하는 것은 유치한 정치적 전술에 불과할 뿐이다.

 

▲ 사진출처=pixabay.com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인격이고 인권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소수자는 이미 그 자체로 고통의 질곡을 견뎌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압력과 차별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권적이다. 다행히 인류의 문명은 뒤늦게 그러한 폭력에 대해 성찰하고 공존을 선택하고 있다. 성소수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악당도 파렴치범도 아니다.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가둬놓을 권리는 없다. 만약 21세기에도 흑인노예가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용인할 것인가? 그들이 소수고 약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차별할 권리가 백인 강자 다수에게 있는가? 이런 물음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라고 다르지 않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그 언어를 구별하지 못하니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내가 철저한 이성애자고 다수자라고 해도 동성애자와 소수자를 억압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 자체가 조심스럽다는 게 사실 화가 날 일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났던 이들은 바로 약자, 소수자, 국외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린 뒤 북이스라엘이 먼저 아시리아에 함락된 후 그 제국의 혼혈정책으로 인해(그 이전부터 북이스라엘은 개방적이고 친그리스 로마적이었다. 반면 나중에 바빌로니아에 멸망한 남유다는 배타적이었고 반외세적이었으며 바빌로니아의 분리정책에 따라 혼혈이 적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유다인들이 노골적으로 비하했던 시대에, 그것도 ‘유다인의 자식’인 예수님은 사람들이 ‘불가촉천민’처럼 대하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다가갔던 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건 ‘성적인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가볍게 일축할 문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다수라는 울타리를 방패삼아 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할 권리는 없다. 만약 나의 가족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군가 장애인이거나 성소수자라고 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무시에 대해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에 대해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리안 감독이 <결혼피로연>에서 아버지의 독백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폭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며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아직도 그런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과정을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 가느냐 하는 것이 미래의 사회에 보다 성숙한 진입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다름’조차 품었다. 그런데 우리는 ‘다름’을 여전히 ‘틀림’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1데살, 5, 14)*

내가 이성애자라고 해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비난하고 억압할 권리는 없다. 적어도 그게 나의 신념이다. 굳이 소수자의 문제를 따지려면 극소수의 강자가 국부의 60% 이상을 독점하면서 착취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싸우는 게 먼저 아닌가?

(바오로 서간문의 이 구절조차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성소수자로 해석하려는 이들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해석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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