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일까? 어찌 보면 참으로 쓸데없어 보이는 이 질문을 두고 오랜 시간 참으로 많은 이들이 다투었다.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다. 그 답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참으로 있는 행복의 목적이 달라진다. 참으로 있는 기쁨과 분노가 달라진다. 우리 삶이 달라진다. 그렇게 이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은 우리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과 이어진다.

누군가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믿었다. 그 질서를 믿고 그 질서에 순응하면 참다운 행복이 주어질 것이라 믿었다. 언제 어디에서 말이다. 그 형이상학적 믿음은 윤리적 행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윤리적 행위는 ‘순응’을 정당화했다. ‘순응’은 하나의 사회를 유지하기 좋았다. 조금 불편하고 때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사회의 결속을 위해 참았다. 참다운 행복은 그렇게 ‘순응’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 사진출처=pixabay.com

 

‘분노’는 참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이성의 분노보다 순응의 길을 갔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속한 종교의 부당한 악행을 봐도 참는다. 가난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약한 자를 속이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이 조차 부족한지 사과 조차 하지 않는 종교를 본다. 자연스레 이성은 분노한다. 하지만 분노의 일어남보다 ‘순응’하란 생각이 먼저 분노를 지배해 버린다.

자신의 속한 종교의 악함보다 자기 종교의 그 이상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침묵한다. 하나의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는 악한 변명 속에 이성의 치열함은 침묵해 버린다. 그 침묵이 익숙한 일상이 되면 어느 순간 순응만이 남는다. 권력자는 순응을 좋아했다. 부당하고 힘들어도 참아라! 참으면 어느 순간 그 인내의 보상으로 그대들은 사후 천국 상급을 받을 것이다!

지금 부당하고 불합리해도 참아라! 순응해라! 그것이 참 행복의 길이다! 이렇게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하느님 닮은 모습인 이성의 힘을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그냥 순응한다. 보편적 질서라는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진지함은 권력에 의해 통치 수단이 되어 버린다. 현실 속 부당함과 불합리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들의 권력에 분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힘든 삶 속에서 매순간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종류의 힘겨움과 고통 앞에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기 쉽지 않다. 자신만의 답을 찾기엔 더욱 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고민해야 한다. 궁리하고 치열하게 다투어야 한다. 또 분노해야 한다. 나쁜 것은 나쁘다. 악한 것은 악하다 분노해야 한다. 참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거짓을 두고 분노해야 한다. 바로 이 때 우리 앞에 참으로 있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 행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쩌면 힘겨운 고민이 쉽지 않아 그저 이것이 답이라며 강제된 보편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된다. 그것이 편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 보편의 질서가 사실은 권력자의 욕심이 만든 거짓 허상일 수 있다. 그 거짓을 추구하며 자기 삶을 희생시키고 살게 될지 모른다. 즉 자기 행복이 아닌 누군가의 쾌락 도구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참다운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살다 말이다.

저마다 찾아오는 고통과 아픔은 너무나 다양하고 저마다 처한 상황이 너무나 다양하다. 그 개별적인 다양성 속에서 그저 보편의 질서라고 주어진 것은 어쩌면 거짓일지 모른다. 행복을 위한 보편의 질서란 것이 사실은 거짓일지 모른다. 정말 존재하는 것은 지금 남과 다른 자신의 개별적 조건 속에서 남과 다른 개별적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자신의 개별적 아픔에 대한 자신의 개별적 궁리와 치열함으로 얻은 바로 자신만의 개별적인 진리가 정말 자신에게 존재하는 가치 있는 무엇일지 모른다.

하나의 보편적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개별적 진리들이 존재하며, 그 개별적인 여럿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다투고 화해하며 역사의 진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 참다운 보편적 행복이 이루어지는 자리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모두의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나 한 사람의 진지한 고민에서 시작된다.

부당하다면 분노해라. 순응을 이야기하는 보편의 질서는 어쩌면 하느님이 허락한 자신의 치열한 고민의 능력, 바로 그 이성을 입 닫게 하는 악한 장치일지 모른다.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면 분노해라. 분노가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소중한 존재의 모습인 이성의 참다운 모습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분노가 모이고 모여서 여럿이 될 때, 그 이성의 치열한 고민의 힘으로 역사는 조금 더 느리지만 바른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지금 자기 종교에 부당함이 있다면, 자기가 속한 국가와 학교 그리고 회사에 부당함과 불합리함이 있다면, 순응이란 이름으로 침묵하지 말고 소리치자. 그것이 참다운 존재를 향한 형이상학적인 삶의 시작이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소중한 능력이 드러나는 신학적 삶의 시작이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미학이 구현되는 삶의 시작이다.

분노하자. 지금 분노해야 할 때다.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전공하며,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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