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식당과 야전병원서 근무’ 회유, 성매매업자들 앞세워 마구잡이로 끌어가”
“‘군식당과 야전병원서 근무’ 회유, 성매매업자들 앞세워 마구잡이로 끌어가”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8.05.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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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증거 자료집 발간'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1회

‘위안소’(慰安所)는 1937년 중국침략 당시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상하이 주둔 일본 군부세력이 ‘위안부특별지구’를 단독 운영할 정도로 만연했다. 군은 성매매업자에게 위안부 여성 동원을 의뢰했다. 조선과 일본 등에서 여성들이 유괴와 납치, 사기 등의 수법으로 마구잡이로 끌려갔다. 일본정부도 군부의 위세에 눌려 불법을 눈감아 주었다. 위안부 강제동원 근거자료들이 속속 밝혀졌지만, 일본정부는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2015년 박근혜 정권이 국민협의 없이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이런 사실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역풍을 맞았다.

 

1931년 일본군이 중국 홍커우(虹口)를 점령하자, 군인을 상대로 한 일본 성매매업자들이 몰려들면서 홍등가가 조성됐다. 전쟁 중인 군인들의 스트레스와 혈기를 달래줄 ‘위안소’ 수요가 급증했다. 종국에는 해군당국이 유흥가 전체를 ‘해군특별위안소’로 지정해 운영했는데 이것이 위안소의 시작이다. 1937년 일본육군의 ‘야전주보(野戰酒保) 개정’ 문서에도 위안소 운영 증거가 나타나 있다. ‘주보’(酒保)란 PX(군매점)로 오락실과 식당이 있었는데, 여기에 위안소를 겸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점령 도시마다 위안소가 속속 들어섰다. 위안부 모집은 일본과 조선, 대만 등에서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수요가 급속히 늘면서 업자들의 유괴와 납치, 사기 등을 통한 강제연행이 극에 달했다. 1937~1945년까지의 위안부 증거자료 번역본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 자료집1’이 호사카 유지(63) 세종대 교수에 의해 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구체적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아시아에서 최초다. 중국도 이 자료집을 요청한 상태다.

“위안부 관련 자료는 아직도 많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위안부를 운영한 증거문서들을 어렵게 모아 편집한 것이다. 앞으로 4권까지 발간할 예정이다. 특히 중국 각 지역과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등의 위안소에 동원된 위안부 여성에 치중했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기도 한 호사카 교수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억지 주장에 맞서 경상북도 그리고 학계와 공조해 ‘한·일 공동 독도세미나’를 여는가 하면, 초중고 교과서에서 독도문제를 깊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한국인 중에 독도가 왜 우리영토이고, 일본주장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비해 일본 20%의 지식층들은 한·일 역사문제와 관련해 철저한 논리와 근거를 연구하고 숙지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를 세종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어릴 때부터 한국과 인연이 많았던 그는 일본 도쿄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고, 2003년 귀화했다. 호사카 교수로부터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독도분쟁, ‘신친일파’ 문제, 일본의 역사왜곡과 해양영토전략 등을 들어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는 3회에 걸쳐 게재된다.

 

- 한국과의 인연이 많다.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

▲ 일본에 있을 때, 직접 만나서 겪은 한국인들은 재능과 인격 면에서 매우 뛰어난 민족이었다. 렌즈 회사를 운영하는 제 부친도 사업상 만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대단히 높게 평가하셨다. 그중에 서울대 교수분이 계셨는데 일본인 중에서는 그런 훌륭한 인격자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셨다. 저도 한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았다. 한국 사람이 사는 집에 가면 한국의 전통적 분위기에 많이 끌렸다. 대학에서 재일교포 친구들을 많이 만난 것도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런 친구들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나 남북분단, 일제강점기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명성황후 이야기는 어떤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일 관계사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렇듯 저의 집안이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과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 인연들이 결국 한국으로 오게 만들었다.

 

- 특별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 중고등학교 때부터 세계사 등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 역사에 심취했었다. 수학도 잘했다. 그래서 아버님이 이공계 대학으로 가라고 했지만, 역사 등 인문학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게 됐다. 남자만 4형제인 집안에 내가 차남인데 렌즈회사를 경영하셨던 부친께서 당연히 나를 공학도로 키워 연구개발을 맡기려 하셨다. 위의 형님은 회사 경영을 맡았다. 장남이었다면 한국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레슬링선수 역도산과 야구선수 장훈, 무도인 최배달 등이 대인기였다. 이들은 모두 재일교포다. 대만출신인 왕정치 선수도 유명했다. 이들이 모두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포츠와 연예인에 관한 신상정보를 잡지 등을 통해 알게 되면서 관심이 커졌다. 당시에 프로야구선수로 유명한 가네다 마사이찌 선수가 있었다. 400승을 거둔 대단한 사람이다. 한국명이 김정일(金正一)인데 북한사람이었다. 일본인으로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때는 외국출신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는 스포츠선수들이 모두 우상이었고 영웅으로 보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연예인 중에 노래를 잘하는 가수나 배우들을 보면 한국인이 많았다. 일본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알고 보면 다 한국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한국인과 한국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 귀화 후 일본 이름을 고수하는 이유는.

▲ 저는 일본 호사카(保坂) 성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앞의 ‘호’자를 따서 한국이름을 ‘호유지’로 몇 번 바꾸려 했었다. 그런데 ‘호’라는 성을 중국 오랑캐 ‘호’씨로 보고 중국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성을 찾다가 한국에는 없는 ‘보(報)’씨를 택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말렸다. 그동안 독도문제 등을 한국 사람과 같이 연구해 온 연유로, 일본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게 더 낫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일본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독도운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 은퇴한 다음에 바꿀까 생각 중이다. 성씨의 참 본(本)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지금도 호적상 본적이 공란으로 비어 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하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위안부, 언제 비롯됐나.

▲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부터라고 보면 맞다. 물론 이미 그전에도 일본군이 만주에 설치한 위안소에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한 일이 있었다. 중국 점령지에 있던 위안소는 대부분 일본인 포주들이 일본 군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성적 유흥시설’이다. 이것을 상하이 주둔 일본해군이 해군특별위안소로 지정해 운영했다. 이것이 위안소의 효시다.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 여성 불법동원이 문제가 되자, 한때 일본 외무성이 일본인 포주의 중국입국을 강력히 막았고, 일본경찰도 불법을 저지른 업자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위안부를 모집하면서 유괴와 납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상하이 일본주둔군의 요청에 의해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 중이라 여성의 해외송출이 법적으로 쉽지 않자 술책을 썼다. 군 식당종업원이나 야전병원에 있는 부상병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단순한 일이라는 명목으로 모집했다. 간호사 자격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끌려가기도 했다. ‘위안부’ 명칭을 쓰면 모집이 어렵기 때문에, 군을 이용한 신분세탁수법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다. 당시 일본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여성들이 속아서 끌려왔다고 했다. 일본어를 아는 여성으로부터 들은 증언들이 많다. 상하이 주둔군과 업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정부 허락 없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일본정부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다.

 

▲ 호사카 교수가 쓴 저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 자료집1’

- 군부와 정부가 따로 갔다는 말인데.

▲ 1937년 11월 중·일전쟁을 위해 조직된 일왕직속 대본영(大本營)은 일본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었다. 정부와 별개조직인 셈이다. 일왕(日王)은 정부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본영 직속의 해외파병 일본군이 정부지시를 어기는 일이 많았다. 일본정부도 모르게 군인들이 위안소 설치를 멋대로 결정했고, 대본영은 이를 추인해줬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일본정부가 추인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 시스템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 됐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육군이 기안한 공문서인 ‘야전 주보(酒保) 규정개정 설명서’(1937년 9월 15일)를 보면 위안소 운영을 했음이 분명해진다. 주보란 군내매점을 말한다. 육군과 해군 함선 등에 설치해 군인과 군속에게 일용품 등을 싼 값에 팔았다. 주보에는 오락실과 식당이 있었는데, 여기에 별도로 위안소를 만들도록 군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나중에는 수요가 늘어나자 위안소 등급을 높인 ‘특수위안시설’로 명칭을 바꾸어 군이 나서서 독자적으로 운용하기에 이르렀다.

 

- 위안부 모집은 어떻게 이뤄졌나.

▲ 일본군부에 의해 위안소 운영이 본격화됐고, 일본군이 점령한 도시마다 다수의 위안소가 속속 세워졌다. 부족한 위안부는 일본 본토와 조선 등지에서 조달했다. 당시 위안부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강제성을 띠게 되었고, 모집수법도 천차만별이었다. 유괴가 빈번했고 납치, 감언이설과 사기, 협박 등 온갖 불법이 판을 쳤다. 이와 관련된 수많은 위안소 운영 공문서들이 밝혀졌음에도 일본정부는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냐면 위안소 설치가 군의 ‘관여’가 아니라, 정확하게 군의 ‘지시’로 이뤄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안부 동원도 군의 ‘지시’였다. 대내외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한 일본정부는 끝까지 이 문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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