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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 전의 ‘반부패⋅반외세’ 농민 함성, ‘완성의 촛불혁명’으로 승화해나가야”

<심층인터뷰> ‘동학농민혁명 124주년’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1회 한성욱 선임기자lse3399@weeklyseoul.netl승인2018.05.0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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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 전인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과 4.19혁명, 5.18광주항쟁, 6월 항쟁, 촛불시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조선말기 부패한 조정과 외세개입으로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처해 있을 때,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결집해 민중봉기를 주도했다. 상하계층 구분 없이 민중들은 동학군에 가담했고, ‘반봉건-반외세’를 부르짖었다. 이런 함성은 지난 2017년 촛불시민혁명에 의해 수구정권이 무너지기까지 민족사적으로 면면히 이어져 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1년 전 1893년 2월 서울에서도 일본과 서양 등 외세배척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기독교와 선교사 등 종교침략을 몰아내기 위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방이 전국곳곳에 붙었다. 하지만 운동은 실패했다. 1894년 3월 외세개입이 극심해지자 전봉준 등 지도부는 이를 국란으로 판단하고, ‘고부’ 봉기에 이어 ‘무장’에서 선전포고와 함께 항전결의를 했다. 반봉건-반외세 항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서울로 진격한 농민군의 기세는 민중들을 일깨웠다. 이이화(李離火)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은 “농민항쟁은 일제와 저항해 싸운 최초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외세에 의해 분단된 유일한 나라다. 갈등은 여전하고 강대국 패권주의가 한반도를 할퀴고 있다.”

2017년 촛불정부가 들어선 뒤 한반도에 훈풍이 불고 있다. 국민들은 통일과 경제협력, 민간교류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원하지 않는 세력과 반통일 세력들은 존재한다. 이들은 동학혁명 당시의 벌열(閥閱) 세력과 같다.

 

▲ 종각역 5, 6번 출구 중간 소공원 서울시유지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 좌상

 

원로역사학자인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은 “반통일 세력들은 건전한 통일과 민주주의를 아무리 얘기해도 좌파로 몰고 간다”며 “수구세력을 끌어내린 촛불혁명은 자주적 민족운동이자 평등을 향한 민주운동이다. 후세들이 이런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서 124년 전의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완성의 혁명’으로 승화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4월 24일엔 123년 전 전옥서(典獄署, 현 종각역 영풍문고 앞)에서 순국한 전봉준 녹두장군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동상건립은 이 이사장의 평생숙원이었다. 국민성금 2억7000만 원을 조성해 세워졌기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자택 서재에서 이 이사장을 만났다. 이 이사장은 여전히 '체인스모커'(Chain Smoker, 줄담배)다. 뿌연 담배연기처럼 흩어진 124년 전의 역사 속으로 돌아가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장군, 조선말 조정과 외세개입, 촛불혁명, 남북통일, 전봉준 동상건립 문제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는 3회에 걸쳐 게재된다.

 

▲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

 

-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24주년이다. 혁명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과 원인을 꼽는다면.

▲ 가장 큰 원인은 조선 말기의 극심한 양반-노비 신분차별과 지주-소작제도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다. 지주들도 나라에 60%의 과중한 조세를 냈지만, 그것 외에 엄청나게 부과되는 징수부담을 힘없는 소작인에게 떠넘겨 불만이 극에 달했다. 부패한 조정도 벼슬을 매관매직하고 있었고, 지방고을 수령들도 지주와 농민수탈에 혈안이었다. 조병갑 군수 같은 탐관오리들의 수탈행각은 전국적으로 만연했다. 여기에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한 부산항, 군산항 등을 통해 옥양목(玉洋木)이 대량 수입됐다. 옥양목은 영국 방직기로 짠 천인데, 목화산업을 마비시켜 경제침탈을 야기했다. 당시 민 씨 세도정치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과 결탁한 벌열(閥閱) 등 문벌중심의 정치체제로 인해 모든 권한이 찬탈당한 것도 원인이었다. 과거시험도 자기들끼리 독차지했고, 다른 세력들은 끼지도 못하는 등 부정행위가 만연했다.

 

- 권력의 수탈이 만연했다.

▲ 사족(士族) 즉, 선비중심의 향촌 지배세력들이 새로 등장하면서 수탈은 더 심화됐다. 이런 체제는 갈수록 공고화됐고, 여기에 지배층의 분열로 조일(朝日)-조청(朝淸) 전쟁이 터지면서 사회경제 기반마저 붕괴됐다. 화폐경제 발달과 함께 농업 이앙법(移秧法) 보급이 확대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가운데, 농산물을 내다팔아 대자본을 축적한 부농층이 다시 등장해 향촌지배구조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한 재지사족(在地士族, 토지를 가진 선비족)들이 문중의 권력과 향약을 활용해 향권(鄕權)을 장악하고, 평민과 천민들을 압제했다. 한마디로 조선후기는 사족(士族)세력과 향권(鄕權)세력에 의한 수탈시대이자 권력사투시대였다. 중앙의 권력가들은 일부 벌열(閥閱)중심의 문벌정치세력들과 같이 권력을 독점했고, 당파전쟁은 날로 심화됐다.

 

- 개항 후 외세 침탈도 극심했다.

▲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강화됐다. 곳곳에 항구가 개항되고 무역량이 늘어났다.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통상관계를 열었다. 하지만 제조업이 전무했던 우리는 원시적 1차 상품만 있었을 뿐, 외국에 내다 팔 경쟁력 있는 변변한 물품이 거의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가장 눈독 들인 것은 금이었다. 한반도에서 금이 가장 많은 곳은 북한지역인데, 매장량은 세계적 수준이었다. 지금도 북한의 금 매장량은 최고수준이다. 남한에도 금광이 있었지만, 국가에서 채굴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1920~1930년대 식민시대에 금광열풍이 크게 일기도 했다. 김완식의 소설 ‘탁류’(濁流)에 나오듯이, 당시 금 열풍은 폭발적이었다. 북한쪽 금광은 미국이 독점해 챙겨갔다. 일본은 서울-부산 간 철도와 전차부설, 전등가설 등 이권사업을 많이 했다. 금에 이어 일본이 가장 많이 공출해 간 것이 쌀이다. 일본은 쌀이 모자라 군대양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고도(古都)인 오사카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문제가 대두되면서 쌀 수탈이 극심해졌다. 특히 부산항과 군산항, 목포항 등은 쌀 공출 전용부두였다. 쌀은 주로 군산항에서 선적돼 일본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일본과 민 씨가 부정 결탁해 비정상적인 루트로 쌀을 수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은 어땠나.

▲ 일본은 일반농민에게서 쌀 공출 대가로 일제화장품을 줬다. 박하분이나 크림 등을 주고 쌀과 바꿨다. 때로는 사탕이나 과자, 성냥, 양주 등을 주었지만, 평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모두 양반과 부자들 차지였다. 수탈로 인해 가난해진 농민들에게 이런 상황은 갈수록 더 극심해졌다. 특히 전라지역 곡창지대인 김제평야 등에서의 쌀 수탈은 극심했다. 일본은 주로 금과 쌀, 콩 등을 빼앗아 갔다. 춘궁기가 되면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외세에 의한 경제침탈은 비참했다. 모든 이권을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착취당했다. 외국선교사가 들어와 미션스쿨을 세우는 등 종교침략을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첩자들이었다.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곳에 제일 먼저 가는 사람이 선교사’라 할 정도로 종교침략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첩자는 아니다. 언더우드 같은 훌륭한 선교사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 외세개입이 극심해지고 전쟁이 벌어졌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은 한마디로 ‘반식민지-반봉건적’인 껍데기 나라에 불과했다. 개항만 했지 국가라 부를 수 없는 나라였다.

<2회로 이어집니다.>

 

 

이이화 이사장은…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기념추진위원회 위원장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
저서 : 2017년 광화문 촛불혁명 현장을 보며 정리한 역사노트<위대한 봄을 만났다>, <녹두장군 전봉준>,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 
후원 : 농협 301-0211-6928-21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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