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박석무

다산은 유학(儒學)의 큰 방향을 두 갈래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산만이 아니라 공자(孔子) 이래 모든 유학자들이 추구했던 당연한 방향으로 본(本)인 경학과 말(末)인 경세학(經世學)이니, 경학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자 수기(修己)의 학문으로 본(本)에 해당하고, 위인지학(爲人之學)이자 치인(治人)의 학문인 경세학은 말(末)로 여겼습니다. 이 두 학문을 제대로 익혀야 융합적인 학문세계가 완성된다고 여겼던 사람이 다산이었습니다.

“경전의 뜻이 밝혀진 뒤에야 도(道)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뒤에야 덕을 이룰 수(成德) 있다. 그러므로 경학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經旨明而後 道體顯 得其道而後 心術始正 心術正而後 可以成德 故經學不可不力:爲盤山丁修七贈言)라고 말하여 선비라면 덕을 이뤄야 하는데 덕을 이루는 근본이 경전이어서 경전에 대한 연구인 경학에 힘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유학자라면 경전의 뜻을 밝혀야 하는데, 그게 아무나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공자나 맹자가 주장한 경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한(漢)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뜻풀이를 했으며, 송(宋)의 주자에 이르러 대대적인 경전 해석으로 이른바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완성했습니다. 조선의 많은 학자들은 대체로 주자의 학설에 만족하면서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다산에 이르러 주자학의 풀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려 232권에 이르는 방대한 다산 경학을 이룩해냈습니다.

『논어고금주』라는 다산의 『논어』연구서는 40권인데, 성리학적인 주자의 해석과는 다르게 다산학적인 다산의 해석으로 이룩된 경전연구서입니다. 어느 날 공자가 곁에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자네들은 내가 숨기는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가  나는 전혀 숨기는 것이 없네. 행하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네”(子曰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논어』述而)라고 말하여 공자나 맹자 시절에는 경학이라는 학문이 나타나지 않을 형편을 공자 자신이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경(經)이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다산의 해석이 나옵니다. “행(行)이란 몸소 행하는 바이니 말하지 않고 가르쳐주는 일이다. 나는 하나의 일도 자네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일이 없으니 자네들은 마땅히 보고서 본받아야하니 나는 숨기는 일이 없네”라고 공자가 말했다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공자·맹자의 시대가 지나 공맹처럼 행동으로 보여주는 학자들이 없자, 이제 경에 나오는 글자까지 풀어서 설명해야만 했으니, 경학이 그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쳤으니 문(文)·행(行)·충(忠)·신(信)이다.(같은 글)”라고 했을 때, 옳은 해석으로 “문(文)은 선왕(先王)의 유문(遺文)이요, 행(行)은 덕행(德行)이다”라는 해석을 뒷받침하여 다산은 말합니다.
“문과 행은 밖의 일이요, 충과 신은 내면의 일이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孝)하고, 밖에 나가서는 제(弟)하면 행함이요, 남을 향해 정성을 다하면 충(忠)이요, 남과의 지냄에서 배반하지 않으면 신(信)이다”라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했습니다.

이렇게 경학의 세계는 분명하고 바릅니다. 주자학의 잘못도 바로 잡았지만, 그들이 미처 풀어서 말하지 못한 부분도 다산은 새롭게 풀어서 ‘다산경학’을 이룩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공맹의 본질적인 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역시 다산경학을 통하는 길이 빠른 길의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성리학적 해석에서 실천가능한 행위의 경학을 이룩한 다산의 업적은 역시 대단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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