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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만 죽으면 된다

<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 5회 강진수 기자lrkdwlstn96@naver.coml승인2018.07.1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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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수학자의 아침》

 

 

고요한 아침에 어울리는 것은 죽음이다. 수학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수학자의 아침이란, 단정한 선분과 같은 죽음. 그것은 너무나 단정하고 명확해서 그 어떤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일 테다. 영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아주 잠깐으로서의 죽음으로부터 이 시는 생과 사의 경계를 자로 재듯 단정하게 설명한다. 죽는다는 것이 잠깐 동안 꾸는 꿈인 것 마냥 말하는 화자의 당당함으로부터 우리는 잠을 자는 행위가 잠깐 동안의 죽음과 같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의 물꼬를 틀 수 있다. 수학자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선 것이다. 일장춘몽과 같이 순간일 뿐인 수학의 세계로. 그것은 실제의 세계와는 달리 너무나도 명확하고 뚜렷하다. 완벽한 삼각형이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실제에선 볼 수가 없는데,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 그런 수학자의 세계 위에서 우리가 생과 사를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판타지 같은 일인지를 기억하며 이 시를 읽어야 한다.

김소연의 세계는 안정적이고 정적인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만 같다. 이 시에는 모든 것이 멈춰 서 있다. 멈춰 있는데 흐른다. 무슨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춰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잠깐 죽는 행위와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죽더라도 아름다운 삼각형처럼, 단정하고 분명한 선분처럼 죽어야 한다. 그렇다고 생의 경계 안쪽에 있는 것들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거대한 관념은 시의 안과 바깥을 모두 아우른다. 우리는 움직이면서도 이 시를 통해 멈춰 서게 되고, 죽었다가도, 다시 일어나 걷게 된다. 생과 사를 쉽게 들락날락거리면서도 그 모든 행동들은 고요한 움직임에게서 비롯된다.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간성과 세계의 특징은 이처럼 모든 모순들에게서 나오며, 신기하게도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순들은 하나의 톱니바퀴를 이루듯 어느 순간에 각자의 톱니와 톱니를 부딪쳐 가며 움직인다.

시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앞서 말한 세계관에 달려 있다. 특히 김소연의 시는 분명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글자 하나하나의 깊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상상과 생각의 연장선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시가 분명하고 단순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름다움의 영역에는 그런 규칙 따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명료한 세계 속에서 멈춰 있지만 동시에 부유하는 글자들을 보라. 그 순간 수학자라는 명료함은 애초에 명료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려고 끄집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시는 그 형체가 불분명하고 영역이 너무나도 넓어서 끊임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문학적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오직 분명하고 단순한 것을 위해서 쓴다면, 얼마나 시라는 것이 공허하겠는가. 위의 시 역시 시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세계 위에서 자신의 영역을 창출한다. 멈춰 있음과 움직임의 모순은 김소연이 선택한 수학자의 세계다. 그렇게 정해놓은 세계의 위에서 수많은 감정들을 뒤섞고 있다. 잘 살고 있지 않다는 화자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차갑게 내뱉는 것만 같은 말들 뒤편에는 뜨거운 것들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은 복합적으로 서로 작용한다. 한 행 한 행씩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단정하지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오직 문장만, 단어만, 또는 수학이라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관념만이 단정하고 분명했던 것이다.

쉴 수 있어야 한다. 죽는 것이든, 정말 쉬는 것이든, 여하튼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한다. 수학자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생과 사의 경계란 이처럼 단정한 것이다. 쉴 땐 쉬고 살 땐 사는 것. 언젠간 직선이 곡선으로 휘어지고, 잘 살지 못하면 눈물과 한숨을 떠올릴 수 있을 때 아침이 지나 낮과 저녁이 된다. 그리고 하루가 그렇게 저물 수도 있다. 오직 고요한 아침만이 있는 세계를 떠올려보라. 모든 사물들이 정지되어 있고 그림자만이 머무는 곳. 그런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의 태엽이 다시 감겨 돌아갈 때, 우리는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과 사의 경계가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고 있지 못하다면, 한 번쯤 죽을 필요도 있다. 잠깐만 죽으면 된다. 아주 잠깐만 죽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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