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닝 포 피스 지음/ 김희진 옮김/ 김영사

과연 치마가 짧아서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일까? 치마 길이와 성범죄율은 정말 반비례할까? 전문가는 누구의 편인가? 저런 억지 주장은 튀니지의 법정에서만 일어날까? 《치마가 짧기 때문이라고요?》는 문제는 치마 길이가 아님을, 치마 길이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바로 문제적임을 직관적이고 압축적인 카툰 형식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자유와 평등,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 세계 카투니스트들의 네트워크인 ‘카투닝 포 피스Cartooning for Peace’ 회원들이 참여해 성차별의 전 지구적 모자이크를 그렸다. 카툰 하나하나가 성평등이라는 지향과 여성의 실제 현실이 얼마나 괴리가 큰지를 강렬하고 생생하게 입증한다.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한 여성의 눈물, 직장 내 차별과 독박육아·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의 한숨, 항시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무력감, 가부장적 악습에 희생된 여성의 절망… 일상의 뿌리 깊은 성차별과 여성 억압의 현장, 성평등 앞에 불평등한 세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과도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인체 모형 속에 한 여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앉아 있다. 콜롬비아 출신의 카투니스트 나니는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의 규범에 시달리는 여성의 대상화된 몸을 마치 기계 도면처럼 그렸다(17쪽). 음흉한 시선뿐 아니라 직접적인 신체 접촉에 노이로제가 걸린 것이 분명한 여성이 경찰서를 찾지만, 경찰은 이렇게 되묻는다. “알겠는데요… 성추행을 당한다는 증거가 있나요?” 스위스의 베네딕트가 그린 카툰(47쪽)이다. 벨기에의 볼리간은 하이힐을 벗고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연단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위계질서를 풍자했다(85쪽).

여성할례 도중 사망에 이른 소녀를 그린 수단 작가 모님 함자의 포스터(52~53쪽)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종교와 문화의 이름으로 여성의 신체와 인생을 훼손하고 소유하려 하는 사회는 자못 분노를 자아낸다. 육아 걱정에 야근하면서 노심초사하는 여성(도시코, 일본, 78~79쪽), 웨딩드레스를 입고 선 거울 속에서 부엌데기가 되어버린 자신의 미래를 투시하는 여성(라이마, 베네수엘라, 104쪽),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한 며느리(수신지, 한국, 119~121쪽) 또한 마찬가지로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다.

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파리 이공과대학에서 철학교수를 지내면서 현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재평가하는 데 주력해온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서문에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농담거리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그날의 의미를 힘껏 기려봐야 3월9일부터 세상은 3월 7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바댕테르는 인류의 절반이 위선적 제스처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낀다고 썼다. 이 책은 그 위선과 모욕을 집약한 카툰의 모음이다. 특히 남성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에 주목해보면, 여성의 권리가 묵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연설을 마친 여성 정치인을 가리키며 “누구 마누라지?”라고 한다거나(루, 프랑스, 71쪽), 설거지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캔맥주를 마시면서 “깡통째로 마시는 것만 해도 설거지하는 아내를 배려해주는 거죠. 제가 틀렸나요?”(글뤽, 벨기에, 106~107쪽)라고 말하는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류로 여기지 않는 셈이다.

이 책은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자각하게 해준다. 때로는 충격적이고 직설적인 그림으로, 때로는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그림으로 페미니즘에 무관심하거나 잘 모르는 남성에게 성차별과 성평등에 대해 고민해볼 거리를 던진다.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구조를 먼저 따져보기 전에 “이브, 왜 당신 월급은 항상 나보다 적지?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야?”(크롤, 벨기에, 10쪽)라고 말하는 일상 속 아담들의 관점을 넓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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