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면사무소 앞에서 남의 자전거를 몰래 훔쳐 타던 그 사건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호된 사고였고 그 때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내 몸에 남아 있다. 이걸 추억이라고 해야 하는지, 평생 나를 따라다닐 멍에라고 해야 하는지….

자장면을 배달하던 친구와의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다. 이것저것 호기심이 늘어가던 나이였다. 아마도 사춘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닐 무렵이었으니.

어느날인가 갑자기 뇌리를 파고드는 충동심. 바로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자장면 배달 친구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둘 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일치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어른이 되려면 반드시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물론 어른들이 봉초담배건 일반 담배건 입에 물고 다니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게 마련인 법. 먼저 담배를 구했다. 가장 싼 담배가 당시엔 필터가 달려있지 않은 `새마을`이란 것이었다. 새마을을 한갑 샀다. 그 때만 해도 나이 어린 애들이 담배를 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른들이 매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돈만 내면 담배를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다음은 담배를 피울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자칫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혼이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둘이서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찾은 장소는 바로 등잔밑. 내가 일하는 이발소를 택한 것이다. 물론 일을 하는 시간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휴일이다. 이때는 주인장과 그 아들도 집에서 이발소에 나오질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피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실행 돌입.

우린 이발소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에서 문을 잠궜다. 만에 하나 있을 우발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을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육각 성냥갑 속에 들어있는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모금을 빨았다. 갑자기 목이 터억, 막히더니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도 나왔다. 하지만 문제 아니었다. 둘은 열심히 담배를 빨아댔다. 조금 지나니 목과 코, 눈도 어느정도 담배 연기에 익숙해졌는지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콧구멍으로 연기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발소 안은 어느새 담배연기로 가득찼다. 혹시나 주인장이 들이닥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럴수록 담배를 피우는 속도는 빨라졌다. 나중엔 목이 몹시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문제 아니었다. 그리고 우린 이 담배 한갑을 빨리 피워 없애버려야 한다.

 

 

나중엔 기분이 몽롱하고 어지럽더니 그만 의자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말았다. 의식을 차리고 보니 담배 한갑은 오간데 없고, 그저 이발소 안에는 마치 불이라도 피운 마냥 연기만 가득하나 게 아닌가. 참 웃기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든 생각. 도대체 어른들은 이렇게 맵기만 하고 맛있지도 않은 걸 왜 그렇게 입에 물고서 늘상 불을 때대는 거지?

시간이 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내 몸도 차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타구니는 거뭇거뭇 성인의식을 치르고 있었고 내 생각에도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발소에서 일한 지도 꽤 되었다. 가끔 주인장이 볼 일을 보려고 외출을 하면서 나에게 손님들 이발을 맡길 정도로 솜씨도 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주인장을 내가 일한 대가로 한 푼의 월급도 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일만 부려먹고 월급은 주지 않는 주인장이 조금씩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장면 배달을 하는 친구와도 자꾸 내 처지가 비교되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당시 한 달에 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내가 일하는 이발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울이발관이라는 이발소가 또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내 또래의 아이도 한 달 월급으로 1만5000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 변화의 원인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친구들보다 일을 덜한다거나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직 손님들이 주는 팁 몇푼과 장날마다 주인장이 주는 100원짜리 동전이 내 수입의 전부였으니….

게다가 매일 손에 비누와 물을 달고 살다보니 손이 온통 다 터서 가렵고 나중엔 진물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발소 맞은 편 양복점에서 일하는 주인아저씨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따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손에 물도 안묻히고 깨끗한 천을 가위로 자르며 한가롭게 양복을 만드는 그 모습이 너무도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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