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한 청년의 비명 소리가 나를 우울하게 한다. 들렸는가 하면 또 들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저 찢는 듯한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나는 그를 모른다. 모르지만 알 것 같기는 하다.

아주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청년의 비명소리를 듣기 시작한 게 벌써 며칠인지 모르겠다. 방구석에서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섰다. 아무 데로나 마구 쏘다니다 보면, 그러면 청년의 비명소리가 더 이상은 들리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겨울이다. 일제히 옷을 벗어던진 나무들이 마치 지금은 겨울이야, 겨울이야 하고 외치는 것만 같다. 내 몸이 삶아지는 것 같은 느낌의 폭염으로 괴로워한 게 언제라고 벌써 겨울이란 말이냐.

“이 추운 겨울에 너희들은 왜 옷을 벗었는고?”

내 입에서 연극대사 같은 소리 한 마디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웃긴다. 웃기지만 웃음은 안 나온다. 나는 여전히 우울하다. 우울한 기분으로 벌거벗은 숲길을 걷고 있는 내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다가 멈추고, 창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아니, 수복이 형님” 소리가 튀어나온다.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너는 누구냐. 의아해서 우두커니 서있는데 뒤따르던 자동차 한 대가 또 멈춘다. 그 차도 역시 창문을 스르르 내리면서 “어라, 수복이 형님” 하는가 싶은 순간 그 옆의 여자가 고개를 살짝 내미는 자세를 취하며 “안녕하세요”한다.

곧 이어 자동차 두 대의 문들이 활짝, 활짝 열리면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대의 자동차에서 나온 사람이라 봐야 남녀 두 쌍 네 명밖에 안 되지만, 거의 동시에 나오고 보니 마치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다. 모두가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다.

 

예전의 나는 그들을 전혀 몰랐었다. 지금의 나는 그들을 안다. 제대로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해도, 어쨌든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야 있겠느냐고, 선운산 중턱 어디에 있는 근사한 찻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자는 그들의 싹싹한 친절이 나를 난처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들의 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가는 중에 그들이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치고 오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운동을 했으니 산중턱에 있는 찻집에서 낭만도 좀 즐기겠다는 생각으로 산길을 오르던 중에 나를 발견했다는 얘기였다. 희미하나마 내 기억속의 그들은 골프가 환경을 망친다고, 결국은 나라를 망치고 지구 전체까지도 망가뜨릴 것이라는 등의 얘기로 입에 거품을 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골프를 즐기는 모양이다. 하긴 이 세상에 영원토록 변치 않는 생각이 어디 있으랴.

“아유 난 해외여행 싫어. 지겨워 이제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한 여인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투로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진저리를 친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투의 그 진저리를 맞은편의 여인이 받았다.

“나도 이젠 그만 가고 싶어.”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그것이다. 같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부동반 해외여행 계를 묻어놓고 해마다 여름 겨울 두 번씩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날아가서 여름의 폭서와 겨울의 추위를 피해 왔다는 얘기였다. 패턴이 같은 여행을 몇 년 계속 하는 동안 여자들은 서서히 싫증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여자들 하고는.”

남자들 중 하나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여자들이 뭐, 응? 여자들이 뭐.”

여성성의 발끈한 목소리가 천장을 찌른다. 그 말을 곱게 해석하지 못한 남자의 뒤틀린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다시 여자의 날선 목소리와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이기 시작했다.

 

우울한 내가 유복한 사람들의 부부싸움이나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만 나오기로 했다. 차로 올라갈 때는 십 분도 채 안 걸렸던 거리가, 걸어서 내려오고자 하니 한 시간도 넘게 걸린다.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청년의 비명소리가 다시 또 내 의식을 건드린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부러지는 순간에나 터져 나옴직한 비명소리가 마치 실제로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 비명을 지를 만한 누가 있나 하는 생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첩첩으로 늘어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뭇잎이 무성한 계절에는 나무가 안 보인다. 나뭇잎만 보일 뿐이다. 나뭇잎도 앞에 것만 보이고 뒤에 것은 그림조차도 볼 수가 없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계절이 되고 보니 나무들은 앞에 것이나 뒤에 것이나 모두가 함께 저마다의 특징을 자랑하며 여기저기 도처에 우뚝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나무들의 그런 모습이 흡사 나를 조롱하며 묻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짓도 못 하는 너는 누구냐. 왜 거기 그렇게 퍼질러 앉아 있는 것이냐. 그렇다. 나는 아무 짓도 못 한다. 그저 한 청년의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혹은 착각하며 우울해 하고나 있을 따름이다.

깊은 밤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말려 들어간 청년,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만 그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현장 점검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강력한 밝음을 자랑하는 엘이디 시대에 휴대폰 불빛 하나로 어둠을 밝혀야만 했다니 이게 대체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사고인가. 회사는 그에게 흔해빠진 랜턴 하나도 지급할 여유가 없었던가 보다. 돈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와 함께 민주사회가 열렸다고 좋아라 했건만, 민주는 구호 뒤에 숨어서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시대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노라면 숨이 턱턱 막힌다. 아아, 배가 고프다. 아니 허기가 진다. 밥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플 것만 같다. 차라리 막걸리를 마실까? 그래야겠다.

눈에 보이는 아무 데나 막걸리, 파전, 메뉴가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주인의 얼굴이 낯익다.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깜짝 반가워하는 그녀를 나는 한참 만에 알아보았다. 아아 그렇구나. 그녀의 남편을 내가 형님이라고 불러 왔었지 참.

관광지의 음식점은 겨울이 비수기여서, 손님은 한 명도 없다. 여자 주인은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고, 남자 주인은 방구들이나 지키고 있는 모양이고, 주방에서는 이국적인 여인이 하는 일도 없이 왔다갔다 서성거린다. 주인들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판에 종업원을 두고 있으니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아 그것이 그렁게, 태국 여자여, 태국 여자.”

겨울이 삼백육십오 일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그때는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그래서 아예 겨울부터 데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그녀는 신분이 불법체류자여서, 안전하게 먹이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에 소액이나마 월급까지 주고 있으니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은 이제 구할 수도 없어. 가까스로 구했다 해도 어디서 월급 더 준다 하면 그냥 가 버리거든. 그래서 우린 이제 한국 사람은 안 쓰기로 했어.”

외국인이 아니면 일 못해먹는다는 얘기가 이제는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갯벌 작업도 외국인이 없으면 못 할 지경이고, 농사 현장도 외국인이 절반 이상이고, 축사 같은 악취가 많이 풍기는 곳에서는 주인을 제외한 한국인은 아예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제는 식당에서도 외국인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나이 칠십을 넘어 팔십을 바라보는데도 돈 벌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여자 주인의 모습이 신기해서 나는 그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서울의 자식들에게 아파트를 사 주고, 단독주택도 사 주고, 자동차도 사 주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눈빛은 별처럼 빛난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 쓴 돈은 거의 없다. 그저 먹고 자고 병원이나 드나드는 데 조금 썼을 뿐이니, 이만하면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한 것 아니냐는 자랑스러움이 그녀의 말투에서 뚝뚝 묻어난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다. 남자들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고, 여자 주인은 “어매 삼촌, 삼촌들”하고 깜짝 반가워하며 벌떡 일어선다. 그들은 풍천장어에 복분자를 주문해 놓고 앉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차를 칠 년씩이나 타고 다닌다면 그건 바보 아니냐 하는 느닷없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인건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일 못해먹겠다는 푸념이 한참을 이어지는가 싶더니 경제가 안 좋다고,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는 등의 경제타령을 지나서 이야기는 다시 자동차로 돌아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차는 삼 년이여, 삼 년. 삼 년마다 한 번씩 업그레이드를 해줘야 한다니까.”

그 말을 듣겠다는 생각도 없이 듣고 있던 내가 문득 부끄러워진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중고차를 사서 오 년도 넘게 타고 있으니, 이런 나는 아마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긴 어쩌면, 그래서 나는 경제가 안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따위 어려운 말을 언급조차 못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누가 왜 무엇을 근거로 경제가 안 좋다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떻게 되면 경제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게 될까. 사람마다 각자 전용 헬리콥터를 갖는다면, 그러면 경제가 나쁘다는 말을 안 하게 될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동차 시대를 넘어 헬리콥터가 시대가 되면, 자가용 로켓 시대를 열망하며 경제가 너무 나쁘다고 투덜거릴 게 틀림없다.

어쨌든 나는 우울하다. 경제가 무엇인 줄을 몰라서 우울하고, 사람들이 왜 도시를 선호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우울하다. 생명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산 현장에서는 일손이 없어서 아우성인데, 삭막한 콘크리트 숲속 도시에서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인 이 시대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