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지음/ 문학동네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마멸되어가는 몸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으로 '시간’과 ‘죽음’의 상상력을 선보여왔던 박서영 시인의 세번째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가 문학동네시인선 118번으로 출간됐다.

2018년 2월 3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시인의 1주기에 맞춰 펴내는 유고 시집이다. 최종 원고를 보내온 2017년 10월 18일에 맞춰 시인의 말을 덧댔다. 빼어난 심미적 사유와 감각을 견지하고 사물들의 소실점에 내재된 고통을 탐사했던 그의 초기 시에는 ‘수채처럼 번지고 뒤섞인 시간들을 가슴 깊이 각인한 사랑의 심장’(유성호)이 뛰고 있었다. 박서영은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세번째 시집에서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사라진 손으로 일기와 편지를 써내려간다. 눈송이가 내려앉아 두 뺨을 잠시 차갑게 만지고 떠날 때 시인은 찰나가 영원이 되는 시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을 생각한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풍경에 빛의 뿌리를 끌어당겨 환한 몸살을 앓았던 시인은 시적 화자가 놓인 그 독특한 위치성과 주저하는 힘으로 예정된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무덤으로 내려가기로 약속된 엘리베이터 앞에서 ‘삶’을 누를지 ‘죽음’을 누를지 서성이는 일과 같았다(「혼자서는 무덤도 두려운 내부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시작, 2006). 상가(喪家)로 향하는 화살표를 보며 생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임을 절절하게 노래한 바 있던 그. 울면서도 졸면서도 왔고 사랑하면서도 아프면서도 왔던 길, 와보니 또 가야 하고 하염없이 가야 하는 이 길(「죽음의 강습소」, 앞의 책)이었지만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이 혼자 마주해야 하는 것이 죽음이기에 두려웠으리라.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이 세상 한쪽으로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 사라지는 것은 완결되지 않고 사라지는 중이며, 아무리 손 흔들어도 이별할 수 없다. 추락해야 하는데 나뭇잎은, 가지에서 떨어져 바닥에 닿아야 하는데 거미줄에 붙잡혀 허공에 매달려 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아직 서로를 잊고 있는 중이며, 죽음으로 처리되지 않는 실종의 세계에서 화자는 영원히 기다리고 있다. 눈을 떠 당신의 부재를 확인하기 전까지 당신은 떠난 것이 아니다. 이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첫 시집부터 시인 박서영이 천착해왔던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번 세번째 시집은 사랑과 이별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랑을 나의 몸과 이번 생과 작별하는 과정이라 불러도 될까. 모든 것이 눈물에 젖은 세계에서 둥글고 향긋한 즙이 묻어 있던, 지구에서 내게 유일한 사람처럼 아름다웠던 그와 이별하는 과정이라고. 시인의 눈에 목숨 있는 모든 것은 상처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몸을 얻은 것들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그 몸을 잃기까지 짓물러터져야 한다. 살아 있음은 상처 입을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산 것들의 고통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인의 시선에 비친 육체는 관(棺)이었으나 이제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울음을 다 발라낸 매미의 황금빛 허물을 비춘다. 시인은 이제 텅 빈 괄호가 되어 뒤편의 세계를 엿본다. 그에게 있어 우리의 몸은 정확한 노선을 따라 여행하는 버스이자 예정된 도착을 기다리는 하나하나의 정류장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그 사잇길에서 우리는 가끔 스쳐가기도 하는 얼굴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시인의 시선은 이제 마땅히 올 것에 대한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이의 옆얼굴로 향한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곁을 따스한 인기척으로 물들이는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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