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지음/ 문학동네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1983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폭력에 노출된 인간 존재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여 “한국사회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 치열하고 독특한 예술가는 사랑의 패배를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랑과 헌신의 형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정희진)라는 평을 받아온 작가 정찬의 신작 장편소설 '골짜기에 잠든 자'가 출간됐다. 올해로 등단 36년을 맞은 작가의 열일곱번째 작품이자 '길, 저쪽'(창비, 2015)에 이어 4년 만에 선보이는 아홉번째 장편소설이다.

이번 소설에서 정찬은 비틀스의 존 레넌과 혁명가 체 게바라, 그리고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를 한자리에 불러모은다.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의 빈 공백에 상상력을 채워넣으며, 세계사를 뒤흔드는 격전과 각자의 처참한 고통 속에서 작가, 혁명가, 음악가 세 사람이 마주한 숙명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진지하게 탐색한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어 그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묵직한 여운과 함께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비틀스가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1965년의 어느 날, 존 레넌은 한 무명작가의 책 '어떤 무명인의 비망록'을 떠올리게 된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쓰였다는 사실 외에는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 책은 5년 전 레넌이 사랑하던 여인 아스트리드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이었다. 비틀스의 음악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그럴수록 레넌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꿈꾸던 삶에서 점차 멀어지는 듯한 불안을 느낀다. 그런 와중에 떠오른 책이 바로 그 무명작가의 책이었다. 그 책에서 무명작가는 “모든 것이 끝났다. 내가 진정한 작가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적으며, 머지않아 닥쳐올 전쟁에의 예감과 함께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책망한다.   

남모르는 고독과 불안 속에서 피폐해져가던 레넌은, 가장 즐겁게 노래하던 시절에 접하게 된 그 책에 다시 한번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고 아스트리드에게 연락한다. 그 책을 아직도 갖고 있는지 묻는 레넌의 물음에 아스트리드가 들려준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스트리드는 우연한 계기로 엘리아스 카네티의 강연을 듣고 바로 그 책 '어떤 무명인의 비망록'이 그에게 무척 소중한 책이었지만 그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책을 향한 카네티의 순수하고 깊은 애정에 감동해 자신이 갖고 있던 책을 그에게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존 레넌과 엘리아스 카네티, 체 게바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엘리아스 카네티와 체 게바라가 만나게 된 건 카네티의 딸인 티나가 체 게바라를 따라 혁명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하면서이다. 정찬은 카네티와 체 게바라를 ‘혁명’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하면서, 소설의 맨 처음에 나온 '어떤 무명인의 비망록'의 의미에 대해 우리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전쟁의 참화와 인류의 비극 앞에서 혁명가와 예술가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 정찬은 연결 고리가 없는 작가, 음악가, 혁명가를 한자리에 불러모음으로써 참혹한 현실 앞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쉬운 예술의 힘을, ‘언어’의 힘을 끝내 긍정한다. 세계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엘리아스 카네티, 존 레넌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책이 ‘무명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다시 한번 새겨볼 만하다. 저자의 이름을 ‘무명’으로 설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리에는 어떤 사람이든 채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한대의 가능성은 이름 없는 개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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