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
[신간]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9.12.06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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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브 빈치 지음/ 이은선 옮김/ 문학동네
ⓒ위클리서울/문학동네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특유의 따뜻한 이야기와 위트 있고 생생한 인물 묘사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 메이브 빈치. 그의 대표작 '그 겨울의 일주일'과 '비와 별이 내리는 밤'이 한국어로 번역·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이제 메이브 빈치는 국내 독자들의 마음속에도 다정하고 편안한 이야기꾼으로 선명히 자리잡았다. 이번에 소개되는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시기에, 가족 구성원들은 일 년 내내 애써 묻어두었던 서운함을 불쑥불쑥 드러내며 갈등을 빚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떠나보낸 이들은 유독 외로운 겨울을 보낸다. 빈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현대사회 가족들의 면면과,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진중하게, 그러나 시종 진실되게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온기어린 시선으로 맛깔나게 그려내는 빈치의 장기가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화려한 장식과 푸짐한 식탁, 집안의 편안한 온기와 화기애애한 가족들, 그리고 창밖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완벽하고 이상적인 크리스마스란 그런 모습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심술쟁이 의붓딸의 등장과 함께 오붓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는 위태롭게 흔들리고(「크리스마스의 첫 단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저마다 수상쩍은 비밀을 숨긴 채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크리스마스 사진 열 장」), 어떤 가족들은 연말마다 온갖 불평과 비방으로 명절 분위기를 망치는 집안 어른들을 또다시 상대해야 한다(「크리스마스 선물」 「온 동네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호텔」). 급기야 마트에서 쇼핑 카트가 바뀌는 바람에 도무지 활용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타인의 식재료와 물건들로 어떻게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치러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화이트 카트」 「스티븐의 파티」).

이렇듯 모두가 정신없고 고단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지만, 분주한 명절 기간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음식 준비와 집안일을 떠맡은 여성들이다. 오랜 가사노동 끝에 지독한 피로와 무기력에 빠진 아내에게 남편은 ‘올해 크리스마스는 다를 것’이라 장담하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이 가까워질수록 의심과 불안은 커져만 간다(「올해는 다를 거야」). 또다른 여성은 자신의 아이들과 부모, 전남편의 새로운 가족, 현재 자신의 파트너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모두 초대해 파티를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대가족」). 메이브 빈치는 전통적인 가족 행사에 수반되는 고질적인 피로와 갈등을 유머러스하고 실감나게 묘사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가족의 양상을 작품에 반영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인물들은 이혼과 재혼 등을 통해 형성되고 뒤바뀌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애쓰고, 그 과정은 대체로 고되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관계의 형태와 양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가족’의 본질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간의 애정과 믿음, 그리고 이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물들은 서서히 가족의 의미를 확장해나간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가족과 함께해야만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가족들뿐 아니라 혼인이나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순전한 타인들도 가장 추운 계절에 서로에게 누구보다 따뜻한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파혼의 후유증에 몇 년째 시달리고 있는 런던의 초등학교 교사는 크리스마스의 단란함을 피해 도망치듯 뉴욕으로 떠났다가, 학교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소중한 인연을 만난다(「미스 마틴의 소원」). 반대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뉴욕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남자는 여행사 직원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고,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특별한 연말을 보내게 된다(「전형적인 아일랜드식 크리스마스는…」). 그리고 낯선 나라에 터전을 잡은 자식을 만나러 가는 불안한 여행길에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일지도 모른다(「희망찬 여행」).

휴일과 함께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앞과 뒤에 펼쳐진 풍경을 살피게 된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지난 일 년에 대한 후회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이자, 다가올 새해에 대한 걱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다. 하지만 결국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에 담긴 열아홉 편의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그럼에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흘러가버린 날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올해’를 만회할 시간이 남아 있다. 평범한 이들의 인생을 닮은 메이브 빈치의 작품 속에서 자칫 엉망이 될 수도 있었던 크리스마스를 구원하는 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엄청난 행운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고 소소한 기적이다. 그리고 “결심만 한다면 크리스마스를 구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우리에게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를, 조금 더 특별하고 따뜻한 날들을 선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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