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 지음/ 창비

ⓒ위클리서울/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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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화이해를 통해 분단시대 남북 문화교류의 발판을 제공하는 책 '고난과 웃음의 나라: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가 출간됐다. 문화인류학자이자 구호활동가, 탈북 청소년 교육자이기도 한 저자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약 20년 동안 10여 차례 방북해 기근 구호활동을 펼치고 조–중 접경지역에서 탈북민과 교류하는 등 활동가로 활약하며 현장연구를 진행해왔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풍부한 대북접촉 경험을 기반으로 북한주민의 삶을 다채롭게 풀어냄과 동시에 북한체제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균형 있게 서술한 책이다. 2013년 출간되어 국내외에서 화제를 일으킨 저자의 전작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가 주로 김일성–김정일체제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분석으로 권력의 작동방식을 다룬 학술서라면, 이번 책은 김정은체제의 변화와 전망을 타진하면서도 권력체제에 포함되지 않는 주민의 일상과 의식까지 담아낸 생생한 현장기록이다. 책은 작금의 북한주민의 삶과 내면이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그에 따라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를 설명해준다. 궁극적으로는 남과 북이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꼭 필요한 상호이해의 밀알을 제공하는 저작이다.

김정은 시대의 권력연출과 국가경영은 ‘반복과 변화의 메시지’를 통한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로 설명할 수 있다. 국제적 고립과 오래 기근으로 배급제를 비롯한 국가제도가 사실상 무너진 상황에서 김정은은 개방과 경제부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체제안정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김정은은 선대 지도자들의 통치 방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내용과 양식에는 시대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현대적‧물질적 욕망을 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쏙 빼닮은 외모와 스타일, 장엄한 예술공연, 산업현장 현지지도 등 기존의 권력연출 방식을 재현하면서도 팝 음악과 모란봉악단 등 파격적인 공연, 스키장과 놀이공원 같은 화려한 오락시설, 서양음식점과 종합백화점, 고층건물과 네온사인이 즐비한 도시경관이 쏟아져 나오는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문화적 배경이 자리한다. 사회주의 문명국이라는 목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 문명국은 이념국가의 용어(사회주의)로 발전국가로의 국가목표(문명국) 전환을 명시한 것이다. 저자는 성공적인 권력세습을 통해 체제방어에 성공한 김정은이 본격적인 발전국가로의 전환에 착수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했던 북한의 발전국가 노선들을 되짚으며 앞으로의 변화를 타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나올 것인지, 북한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실제로 북한 사람들의 심리와 문화를 이해하면 핵폭탄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놓지 않는 북한체제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기근 구호활동을 위해 실제 실무자들과 직접 협상테이블에 앉아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사람들의 협상의 문화패턴을 발견해냈다. 당장 구호물품이 필요한 북한이 아쉬운 입장이지만, ‘당혹스럽게도’ 그들은 ‘효율’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한다. 덕담을 나누다가도 돌연 도덕적 우위에 서서 트집을 잡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이 모든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들은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낸다. 저자는 이렇게 빈한한 사정에도 도움의 손길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결기와 도덕주의적 주장, ‘단숨에’ 뜻을 이루고자 하는 태도, 자존심과 결사항전의 의지가 북한 당국과 엘리트집단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에도 담겨 있는 문화적 ‘아비투스’라고 분석하며, 이 연장선상에서 핵폭탄은 상대를 위협할 만한 무기를 쥔 채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관철시키겠다는 사회적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핵폭탄은 북한체제가 우리를 인정해달라는 절박한 외침인 것이다. 저자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속내를 헤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북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며 문화인류학자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디테일한 문화적 현상과 일상의 변화를 감지해낸다. “교수 아들은 교수가, 농부 아들은 농부”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은 뜻밖에도 저자가 북한에서 만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당일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도자의 권력세습 덕분에 북한에서는 다양한 직종의 세습과 계급의 재생산이 장려되고 있다.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와 ‘혁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 북한은 자본주의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불평등한 사회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서울의 강남 8학군 엄마들의 치맛바람 못지않은 평양 엄마들의 교육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 교수들과 과학자들이 입주한 평양판 ‘SKY캐슬’은 계층구조의 심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역차별도 빼놓을 수 없다. 평양–지방의 철저한 구분과 차별은 북한 사람들의 중심지향성을 강화하고 중심과 주변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조부모 또는 증조부모의 사회적 계급성분에 따라 출신성분이 서열화되고 핵심–동요–적대계층이라는 정치적인 계급구분도 존재한다.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같은 맥락에서 ‘평양은 나라의 얼굴’이라는 기치 아래 장애를 가진 평양시민을 평양 밖으로 내쫓는 등 장애차별도 노골적이다. 가부장적 가족국가 질서 속에 여성과 남성 간의 위계서열과 성역할 고정관념 또한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스며든 불평등과 차별의 틈바구니에서는 억눌려왔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고난의 행군’시기 이래 주민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길을 모색해왔다. 공식적인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비공식경제가 이를 대체하면서 ‘남한보다 더 자본주의 같은’ 면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저자는 조–중 접경지역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파견노동자의 삶, 밀수와 뇌물이 횡행하며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무역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고, 장마당과 시장이 확장되면서 여성들이 생활경제의 주역으로 활약함에 따라 가부장적 성별 위계질서에 생기고 있는 균열에도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북한사회의 변화를 체제붕괴의 조짐으로 성급하게 해석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제도와 비공식적인 일상 간의 괴리는 지금도 커지고 있지만 두 흐름 모두 현실이고 그 둘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에도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과 북은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감수성을 연마해야 진정한 공존을 꿈꿀 수 있다. 북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안개를 걷어내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 책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은 한걸음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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