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램덩크' 리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영화 '슬램덩크'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슬램덩크가 만들어낸 신화

“농구… 좋아하세요?”

이 한마디에 농구를 시작한 사람이 있다. 농구를 하면 부자가 된다거나 행복해진다는 주문은 걸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냐는 순수한 물음 하나에 세계가 뒤흔들리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슬램덩크’의 강백호다. 연달아 실패하며 좌절했던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본 한 소녀의 질문에 삶의 의미와 원동력을 찾는다. 그 소녀가 너무 아름답고, 또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농구를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는 90년에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우리의 곁에서 생동하고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색이 바래도 빛을 품을 수 있어서 그런가 보다.

슬램덩크는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그린 만화가 원작이다. 이를 각색해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올해 1월 4일 개봉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5월이 다 지나가는 날까지 여전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영화 속 팀이나 캐릭터를 자유롭게 응원하며 보는 ‘응원 관람'이 자리를 잡더니, 5월 22일은 캐릭터 ‘정대만’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상영회도 열렸다. 팬들이 자체적으로 기획한 단체 관람이 아니라 극장이 주최한 공식 행사다. 이제는 팬들만의 현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다시 찾아온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모양새다.

극장 상영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 있고 이를 필요로 하는 관객들이 있으며, 응원 관람처럼 영화적 체험이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은 코로나 이후에 큰 의미를 갖는다. 최약체 팀이 강력한 적수를 만나 휘청이듯, 극장과 영화계는 팬데믹의 부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영화니까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입소문과 추천, 그리고 출석체크를 하듯 극장을 방문해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이 아슬아슬하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숨을 불어넣고 있다. 이 좋은 일을 한 것이 바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다.
 

극장이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

간혹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과 연관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강세를 주목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는 ‘노재팬’ 운동과 대일외교에 대한 반작용의 연장선이지 국내 영화인들의 쇄국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한국 영화의 잇따른 부진을 씁쓸해하는 종사자들은 있지만, 슬램덩크 신드롬의 탓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정하는 분위기다.

한때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극장을 점거하며 소규모 영화들의 자리를 빼앗는 문제가 있었다. 마블의 오랜 팬이면서도 관객들의 선택지를 줄이고 다양한 영화의 발전을 방해하는 일을 기꺼워할 순 없었다. 줄줄이 문을 닫는 소상공인들을 보며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을 흘기게 되는 마음이었달까. 이제는 그런 생각도 사치스러워졌다. 코로나와 물가 상승으로 전체 관객 수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어떤 영화를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 극장으로 발걸음을 이끄는 것 자체가 시급하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영화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선 안도의 숨이 나온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영화를 보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지’하는 좋은 감상이 먼저다. 그 경험이 영화를 다시 보고 깊이 향유하는 문화를 확산함과 동시에 다시 극장을 찾게 만든다고 믿는다. 자발적인 즐거운 발걸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뿐이다. 그 선순환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꺾이지 않고 오래 남아준 슬램덩크에게 고맙다.
 

영화 '슬램덩크'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농구도 모르고 만화도 잘 모릅니다만

산업적인 시선을 제외한 감상자로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재미와 감동에 충분히 공감한다. ‘농놀'을 즐기는 ‘슬친자' 반열에 들기엔 역부족이지만 말이다. ‘농놀’은 농구 놀이의 준말로, 원작 만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거나 영화를 연달아 보는 행위를 뜻한다. ‘슬친자'는 슬램덩크에 미친 자라는 뜻이다. 영화를 한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팬들이 대중적으로 늘어났다는 반증이다.

나는 인생의 과제가 너무 많은 대학원생이어서 아직 만화는 끝까지 보지 못했고, 영화는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감히 슬램덩크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자신과 같은 강도로 좋아하는 줄 알고 기대했다가 ‘농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를 보고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짓던 한 열성팬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개봉 후 몇 달이 지난 지금, 아직도 슬램덩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글을 쓰고 있으니 2차 창작에 가담한 팬으로 은근슬쩍 주장할 순 있겠다. 실은 영화를 처음 본 순간엔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영화를 볼 생각도 없었다.

원작 만화 연재가 종료된 96년에 태어난 나는 슬램덩크와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웹툰을 보고 자란 세대라 만화책을 보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브리 스튜디오밖에 몰랐으며, 농구를 몇 명이서 하는지도 몰랐다. 비단 만화와 농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신파적 클리셰에 시큰둥한 편이라 스포츠 영화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운동 종목만 다를 뿐, 매번 같은 인물들이 같은 고난과 시련을 딛고 같은 성공을 이뤄내는 장르라는 편견이 있었다. 예고편을 보며 흥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의 일로 여겼다. 오래된 만화가 이제야 영화로 나온 게 의아하면서도, 소수의 팬들만 찾아보고 조용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만화 캐릭터에게 인생을 배웠다

역시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며, 세상에 재밌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갑자기 슬램덩크에 푹 빠져 장항준 감독의 영화 <리바운드>와 밴 에플렉의 영화 <에어>까지 연달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명 농구 3부작을 섭렵하게 된 것은 순전히 슬램덩크가 끼친 영향이었다.

영화가 개봉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제작 소식을 들은 후 개봉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연인 H가 함께 보러 가자고 졸랐다. 한참 이야기했듯, 당시의 나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고급 취미가 되어버린 극장 관람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이거나 스펙타클을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자연스레 한계를 정해두었다. 전공생이다 보니 괜히 어깨만 올라가서 연출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영화가 아니면 더 이상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미지근한 반응을 살피던 H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 자신은 강백호에게 인생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 순간 마치 농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던 백호처럼 거대한 파급력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그 원동력이 궁금한 차였다. 대체 무엇이 만화에 담겨있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을 간직하고 또 소중히 꺼내어 볼 마음이 유지되는 것일까.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못 이기는 척 제안을 승낙했다. 신이 난 그는 일사천리로 티켓을 예매했고, 어느새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터널은 길게만 느껴진다

영화는 주인공 송태섭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버지를 여윈 그는 갑작스런 사고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형 준섭마저 떠나보낸다. 이제 그에게는 어린 동생과 슬픔에 잠겨버린 어머니만 남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준섭에게 배운 농구뿐이다. 형보다 못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태섭은 묵묵히 농구 선수의 길을 걸어간다.

자, 여기까지가 영화의 타이틀도 뜨기 전의 이야기다. 이미 영화 한 편이 끝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이는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어린 소년이 겪은, 천고처럼 길게 느껴지던 어느 시절이 한 챕터로 그려지는 부분이다. 실제 길이는 그리 길지 않다. 모든 이야기는 마치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처럼 몇 개의 중요 장면으로 압축되어 진행된다. 이야기의 무게 때문에 길게 느껴질 뿐이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작 만화에는 없던 이야기라고 한다. 팬이라면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서사가 나온다는 것만으로 만족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섭이 이런 사람으로 성장했구나, 생각하며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더하는 재미도 생겼으리라 추측해본다. 실제로 원작 만화에서 태섭은 손목 아대를 두 개씩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팬들이 이번 영화를 통해 나머지 하나가 형 준섭의 유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밝혀진 비하인드 스토리에 얼마나 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 전율을 생각하면 미리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무엇보다도 원래 만화 속 주인공은 백호였다.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던 인물인 태섭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도 신선한 설정으로 다가왔을 테다.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사람이 떠나버렸다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로 처음 대면한 관객이다. 팬이 아니어도 감상에 지장이 없는 영화를 기대했던 나는 1막의 이야기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물의 고난부터 연이어 지켜보며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섭이 어떤 사람인지 서서히 알게 되고 호감을 느끼며 친근해진 다음이었다면, 편안하게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을 질끈 감게 만든 장면이 있다. 배를 타고 떠나는 형에게 돌아오지 말라며 태섭이 성을 내는 장면이다. 등장인물이 죽기 전에 나오는 클리셰적인 연출이어서 형 준섭의 죽음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같이 농구 연습을 하자는 약속을 어겼다고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태섭의 마음도, 집안의 주장이 되겠다고 어른스럽게 다짐하고도 친구들과 배를 타고 낚시를 떠나는 준섭의 설정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미성숙한 시기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가 구구절절한 설명을 포기하고 에피소드식으로 축약해 전달한 탓이 크다.

물론 압축적인 전개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뒤에도 쓰겠지만, 때로는 쿨한 생략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이제 영화가 시작되어 인물을 소개하는 타이밍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것이 아쉬운 지점이다. 또다시 초상을 치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까지 인물을 몰아넣는 영화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기도 했다. 엔딩의 감동을 위해 억지로 짜 맞춘 과한 플롯이라고 생각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이르게 찾아왔다. 1막이 실은 프롤로그에 불과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팀의 의미

어린 태섭이 퇴장한 뒤, 새하얀 화면에 고등학생이 된 태섭이 스케치로 그려진다. 혼자인 줄 알았던 그의 곁에 다른 인물들도 한 명씩 그려진다. 형의 그림자 속에서 외롭게 농구를 하던 태섭은 이제 북산고등학교 팀의 주전이다. 얇은 선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마치 생명을 입듯 생생하게 움직이더니, 서로를 지키는 든든한 팀이 되어 상대 팀인 산왕고와 맞선다. 강렬한 드럼 비트와 함께 심플한 스케치로 시작된 이 오프닝씬은 어느새 심장을 조금씩 뛰게 만들었다. 앞의 슬픈 이야기에 젖어든 관객들에게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기세 좋게 선포하는 것 같았다.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질 줄 알았던 영화는 오프닝씬이 끝나자마자 농구 경기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태섭이 성장해 고등학생이 되고 팀을 이뤄 경기를 준비하는 장면 같은 것은 시원하게 생략했다. 앞으로는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서서히 고조됐다. 농구를 모르는 사람도, 슬램덩크를 모르는 사람도 이 수많은 인물과 복잡한 경기를 어떻게 즐기게 만들 것인가. 약팀이었던 북산고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관중들처럼, 나 또한 아직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영화를 지켜봤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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