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난과 영화 속 환경·기후 위기] ‘최후의 인류(Extinction, 2015)’
전 세계는 폭염, 폭우, 한파, 가뭄, 쓰나미 등 전례 없는 기후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지구 환경 변화는 앞으로 모든 생물이 멸종되는 ‘제6의 대멸종’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문학에서 환경과 기후 위기를 어떻게 다루었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돌아볼 것은 무엇인지 시리즈로 연재해볼까 한다.
[위클리서울=김은영 기자] 사방을 구분할 수 없이 끝도 없이 떨어지는 ‘눈’, 지구는 투명하게 얼어가고 있다. 차갑게 얼어붙은 기후 위기에 더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생을 달리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도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야 한다.
영화 ‘최후의 인류(Extinction, 2015)’는 인류가 앞으로 미래에 맞닥뜨린 지구적 재난을 어떻게 극복할까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외피는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입은 채 환경과 기후 위기에 대한 깊은 은유를 담고 있다. 영화는 폭염과 가뭄, 폭우와 쓰나미 같은 오늘날의 기후 이상 현상이 영화를 통해 인류를 어떻게 몰아붙일지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후 위기나 바이러스, 괴생명체와의 대결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간 내부의 불신과 단절, 그리고 공동체적 책임의 결핍을 그린다. 영화는 환경이 바뀔 때 인간들의 변화와 그 안에서 인간 사이에 맺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키워드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가장 기대할까. 그것은 바로 ‘선의’가 아닐까. 냉혹한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우리는 타인과 연대하며 함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영화는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맞이하고 있는 기후 위기의 윤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바이러스와 빙하기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
일상은 끝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감염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다. 설상가상 이상기후로 계속 내리는 눈에 남아있는 것들도 모두 멈췄다. 빙하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는 전쟁 같은 혼란의 도입부를 지나, 9년 뒤의 설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화면은 흰 눈으로 뒤 덮인 도시를 이미 세상이 멈춘 듯한 적막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도시에 서 있는 말 한 마리. 한 남자가 나타나 말을 사냥하여 해체한 뒤 타고 온 전동 스노모빌에 싣는다.
남자는 전동 스노모빌을 타고 도시를 벗어나 외딴 산골 마을로 이동한다.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매튜 폭스 분). 그는 차갑게 얼어붙은 도시로 나가 동물을 사냥해 식량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의 옆집에는 잭(제프리 도노반)과 그의 딸 루(퀸 맥콜건)가 살고 있다.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하는 패트릭과는 달리 잭은 노심초사하며 외부를 경계하고 있다.
잭은 이웃집 남자 패트릭의 활동을 창문에 바짝 기대 흥미롭게 구경하는 딸이 늘 걱정스럽다. 수염과 머리를 사자처럼 기르고 자유롭게 사는 패트릭과는 달리 잭의 얼굴은 늘 굳어 있다. 패트릭과 잭 사이에는 과거의 상처와 불신이 깊게 남아 있다. 둘 사이의 담장과 눈더미는 단순한 장벽이 아니라,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인간적 단절을 상징한다.
과거 그들은 서로 친구였다. 갑작스러운 바이러스 발병으로 각 주에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잭과 패트릭, 패트릭의 부인과 딸은 군인들과 함께 안전지대로 대피하던 중이었다. 초소에서 이상 현상이 발견되어 함께 이동 중인 군인이 내려 정찰 중 감염자에게 습격당하고, 대피하고자 했던 이들은 버스 안에서 한순간에 몰살당했다. 패트릭의 부인 에마는 갓난아기를 안고 도망치던 중 감염자에게 물렸다.
패트릭은 에마의 팔을 절단해 감염을 막으려 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에마 또한 감염자가 되어 버린다. 잭은 에마를 잃고 술에 빠져 폐인처럼 살고 있는 패트릭을 책망하며 아이를 자신이 대신 키우기로 한다. 그렇게 둘은 철조망 담장을 사이에 두고 원수처럼 9년을 지낸다.
최후의 순간, 생존자들의 선택
영화 속 눈으로 뒤덮인 설경은 자연의 힘 앞에서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미래 세대가 겪어야 할 새로운 이상기후의 환경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빙하기로 인해 인간들을 공격하던 감염자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염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9년 동안 소리 없이 생존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어느 날 루는 멀리서 낯선 울음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듣고 단순한 짐승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각을 잃었지만 청각에 적응한 좀비였다. 이 장면은 인간이 변화한 환경에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보여준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감염자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며 생존해왔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마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 사라진 줄 알았지만 지금도 계속 변종 바이러스로 진화하고 있는 것처럼 좀비가 시각을 잃고 청각에 의존해 생존하는 모습은 환경 변화에 따른 종의 적응과 인간의 취약성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홍수, 생태계 교란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과 대적하고 있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새로운 산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재앙의 연속이다.
여름에 몰아닥친 폭염과 태풍, 가뭄이 지나면 다 지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에 오는 한파와 지진, 산불에 또 당한다. 인간은 대비를 하지 못하고 그 순간만을 모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인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그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대응 방법을 고심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는 지금의 인류가 궁극적인 해결 방안은 외면한 채 과거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마을을 침범한 진화된 감염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루를 지키려는 두 남자의 관계가 바뀐다. 패트릭과 잭은 이제 합심해 루를 지켜야 한다. 총성이 눈 덮인 숲속을 울리고, 하얀 눈 위로 검은 피가 번진다. 그러나 이들을 공격하려는 감염자들은 끊임없이 몰려오고, 한정된 공간은 점점 더 압박감을 준다. 결국 패트릭은 루와 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는 좀비 무리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잭은 아이를 안고 탈출한다. 영화는 패트릭의 희생을 통해 인간적인 연민,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고자 하는 연대 의식, 자신의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부성애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잭과 루는 설원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향한다.그들이 도착한 곳은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는 언덕 위였다. 이제 눈은 오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을 따스하게 비추며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여정은 불확실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이 더 안전할지,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인류가 지금 내리는 선택이 새로운 희망의 길이 될 수도, 또 다른 파국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최후의 인류’는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환경과 공존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마지막 세대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 작품은 생존의 이야기를 넘어, 세대를 잇는 책임과 인간과의 연대 의식, 환경과의 관계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