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검은 고양이 실종사건

 

밤이건 낮이건 아무 때나 우리 집 마당을 놀이터 겸 식당으로 알고 찾아오던 고양이 한 마리가 안 보인다. ‘검은 고양이 네로’ 어쩌고 하는 노래를 연상케 하는 아주 날렵한 녀석이었다. 몸매도 잘 가꾼 체조 선수처럼 좋았다. 거리에서 그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의 그녀는 대뜸 두 손을 내밀고 다가가서 친구로 삼아버렸다.

그녀에게서 한 번 쓰다듬을 받은 검은 고양이 녀석이 이따금 우리 집 마당으로 산책을 나왔다. 아니 어쩌면 땅을 파고 묻어놓은 음식물 찌꺼기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가끔 찾아와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우리 집 개 마루가 죽어서 자두나무 옆에 묻었을 때는, 검은 고양이가 사흘도 넘게 찾아와서 무덤가에 앉아 있었다. 죽은 개에게서 먹이를 느끼고 찾아오는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먹이를 느꼈다면 땅을 파 해치는 등 부산을 떨었을 텐데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마치 한 생명의 죽음을 추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 낮잠을 자던 중에

 

그러던 녀석이 어느 때부터인지 안 보였다. 거리에서도 안 보였다. 처음에는 때가 되어 어디로 멀리 사랑 여행이라도 떠났나보다 생각했었다. 그 생각 그대로 얼마간 잊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난 뒤에 문득 생각이 나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두 달쯤 지난 뒤에는 납치되었나? 하고 눈을 깜빡거렸고, 세 달이 지난 뒤에는 죽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녀석은 이제 살만큼 살아서, 때가 되어 갈 곳으로 간 것일 수도 있었다.

사라진 고양이가 죽었다는 근거는 없었다. 납치되었다는 근거도 당연히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고양이를 묵념하기에는 아무래도 납치보다는 죽었다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일 뿐이었다. 죽음도 억울한 살해나 교통사고가 아닌, 때가 되면 피고 지고 또 피는 자연의 이치를 준용해서 자연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게 내 마음을 덜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고양이의 얼굴이, 그 걸음걸이가, 그 소리가 어떤 날은 꿈에서까지 보이고 들리는 것이어서, 딱히 불편하달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쨌든 즐거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고, 급기야는 고양이와 나의 관계맺음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도 없었다. 옆 마을에도 고양이는 없었고, 앞마을에서도 고양이 같은 동물은 구경도 해볼 수 없었다.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이란 기껏 닭이나 토끼, 돼지, 개, 염소, 그리고 드물게 소가 있었을 뿐 칠면조나 거위, 고양이, 당나귀 같은 동물은 그 이름조차 들어보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 무렵의 우리 마을 아이들은 고양이를 교과서나 동화책 같은 데서 추상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만 접했을 뿐 실물을 본 적이 없이 자라온 셈이었다.

 

▲ 녀석은 나의 고무신을 좋아한다.

 

고양이의 실물을 본 적이 없이 자란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고양이의 실물을 접했을 때 받은 정서적 동요가 얼마였는지는 조사를 해본 바 없어 뭐라고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만을 놓고 보자면 글쎄, 책에서 본 거랑 똑같네? 하는 정도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내게 이미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겨 있었다.

고양이의 실물을 정면에서 마주한 것은 도시생활 정리하고 지금의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에서였다. 도시에서는 한밤중에 고양이 소리를 듣기는 무던히도 많이 들었지만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봉천동 그리고 미아리 인근 산꼭대기 ‘하꼬방’을 전전하던 시절의 고양이에 대한 기억은 가히 악몽이라 할 만 했다. 

공사장에서 돌아온 뒤의 녹초가 된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마치 걸레처럼 방구석에 던져놓고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멀리서 어렴풋이 무엇인가 꿈결인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곤 했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마침내 왼쪽 골목에서 들리고, 오른쪽 골목에서도 들리고, 앞에서도 들리는가 하면 뒤에서도 들리고, 심지어는 천장에서도 날카롭게 무슨 비단 천 같은 것을 좍좍 찢어내는 것처럼, 혹은 울부짖는 것처럼 소리가 들리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고양이들의 사랑 놀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양이가 연애행각에 나설 즈음이면 그런 소리를 낸다는데 그것 참, 연애라고 하는 달콤하고도 은밀한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영 다르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날카로운 소리를 적나라하게 뿌리고 다니는 고양이에 나는 아마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귀찮게 하는 불청객 동물로는 단연 쥐를 꼽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쥐보다도 고양이가 훨씬 소름 끼치는 동물이로구나 하는 심사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고양이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그 무엇쯤으로 내 안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어쨌든 그때까지도 나는 고양이의 실물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멀리서 날렵하게  지나가는 모습을 어렴풋하게 가끔 보기는 했지만, 이를테면 털을 손으로 직접 만져본다던가,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다든가 해본 적은 없었다.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뒤에도 고양이는 한동안 예의 날카로운 소리의 연애행각에 관한 소리만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내고 있을 뿐 내 앞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다.

 

▲ 살이 오른 뒤로 제법 재롱을 떠는데~

 

십 년도 넘게 빈 집이었던 지금의 이 집을 사서 수리를 하려고 했을 때, 빈 집은 빈 집이 아니라 고양이들의 거처였다는 것을 알았다. 고양이들은 내가 나타나면 삭삭,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있었을 뿐, 자신들의 모습을 내게 정면으로 보여주는 법은 없었다. 어쨌든 집수리가 끝났을 때쯤 고양이들은 죄다 어디로 가버리고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고양이는 놀라운 방식으로 내 앞에 나타나주었다. 어미는 아니었다. 새끼들이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장소가 하필 고사리 말린 것이라든가 우거지 같은 것들을 걸어놓은 헛간이었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려서 들어간 본즉 세상에나 이것이 무엇인가. 그 추운 겨울날에, 손가락 두 개만한 크기의 어린 생명 다섯 마리가 서로의 몸을 비벼대며 응, 응, 소리를 내고 있는데 한눈에 척 봐도 그냥 고양이 새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의 탄생 과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가 고양이 새끼를 보자마자 고양이 새끼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자체도 지금 생각하면 놀랍고 신기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때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추운 겨울날에 저 어린 것들이 얼마나 추울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그것뿐이었고, 그래서 푹신한 솜이불 하나를 가져다가 깔아주고 덮어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가서 보니 이불만 남아 있을 뿐 고양이 새끼는 흔적도 없었다. 나중에 어떤 사람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고양이 어미가 사람의 손길을 느꼈는데 새끼를 그 자리에 둘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요컨대 고양이 어미가 새끼를 한 마리씩 입으로 물어다가 다른 곳에 숨겼다는 거였다. 내가 딴에는 선행이랍시고 베푼 그 행위가 고양이에게는 상종 못할 적군의 침입으로 여겨졌다는 얘기였다.

그 뒤로 한동안 고양이는 우리 집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 근처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고양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도 많았던 야생 고양이가 한꺼번에 모두 이주를 해버린 것인지, 무슨 천적을 만나 떼죽음을 당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마을에서 고양이 소리를 들기는 어려웠다.

 

▲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검은고양이

 

마을에 고양이가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교회 하나가 새로 지어진 뒤부터였다. 교회 안에 쥐가 유난히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예방 차원에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섯 마리 이상의 고양이가 교회 주변에서 목격되었다. 모두가 목에 방울을 달고 있었고, 목줄에 묶인 채로 무료하게 낮 동안을 보내다가 밤이면 이윽고 목줄이 풀려서 이를테면 출근을 하는 녀석들이었다.

쥐 잡이를 목적으로 출근한 고양이들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교회 주변에서만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고양이들의 일터였다. 게다가 고양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먹을 것이 많으면 일을 안 한다는 게 목사님의 철학이었다. 때문에 고양이들은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쥐를 잡겠다고 나대는 모습보다는 음식물 찌꺼기를 버렸거나 혹은 땅에 묻어놓은 곳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고양이 중에 일부는 자신의 거처인 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야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마을은 다시 야생 고양이의 개체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목에 방울을 달고 내려오는 고양이의 숫자도 줄어들지는 않았다. 목에 방울을 단 고양이와 방울이 없는 고양이들이 어떤 협약을 맺고 호혜 협력 내지 상생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두 세력 간에 무슨 큰 분쟁이나 다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추론을 하자면 나의 그녀와 단숨에 친구가 된 검은 고양이는 일꾼으로 사육을 당하던 중에 일을 나와서 귀가를 거부하고 목줄을 어떤 방식으로 끊어버렸거나, 아니면 탈출한 녀석이 새로 낳은 새끼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목에 방울이 있는 고양이는 여전히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출근해서 날렵하게 움직였다. 반면 방울이 없는 고양이는 디룩디룩 살이 쪄서 게으르게 천천히 걸었다.   

사라진 검은 고양이를 추억하며 가끔 애달파 하던 시기의 어느 하루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을 찾아왔다. 목에 방울을 달고 있었고, 역시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피골이 상접해서는 그냥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마치 무슨 털 뭉치를 보는 것 같았다. 작아도 너무 작은, 영양상태가 부실해도 너무 부실해 보이는 그 어린 고양이에게 나의 그녀는 우유를 준다, 생선을  먹인다 부산을 피우기 시작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저도 호랑이 계급의 고양이라고 미약한 소리로나마 앙, 하고 처음에는 이빨을 드러내는 등 제법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 어린 녀석은 우유 한 잔을 거뜬히 핥아서 먹어 치우고, 가시를 발라낸 동태도 한 토막 오물오물 보기도 좋게 오랜 시간 씹어서 삼켰다. 그리고는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영토를 새롭게 개척했다 싶었던 것인지 아예 방으로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야, 야, 여기는 안 돼. 방은 안 돼.”

기특하게도 녀석은 한 마디 그렇게 꾸중을 하면 바로 방에서 나가 주었다. 그러나 좀처럼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돌아갔다 해도 금방 다시 야옹,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엇이든 먹을 챙겨 주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살이 포동포동 오르게 된 어린 녀석은 이제 완전히 우리 집을 자기 집으로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주는 음식을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먹은 뒤의 배설물까지도 기막히게 잘 처리해 내고 있었다.

 

▲ 토방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고양이가요. 산수유나무 아래로 가더니 땅을 파는 거예요. 거기에 쥐가 있나, 했는데 웬걸, 돌아서더니 허리를 웅크리는 거예요. 그렇게 똥 덩어리 작은 것 세 개를 잇달아 내놓더니 다시 돌아서서 흙으로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어느 하루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서는 그냥 미치겠다는 투로 빠르게 쫑알거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풍덩 빠진 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심사는 마냥 편안할 수가 없었다. 토방에 앉아서 길게 하품을 하거나, 네 발을 하늘로 치켜세운 채 잠을 자고 있는 녀석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우리 집에서 이러고 있는 꼴을 목사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까?”
“글쎄, 아무튼 기분은 안 좋겠지?”

그래서였던가. 아니면 무슨 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인가. 그 기특한 어린 녀석은 어느 날부터인지 더 이상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 사흘, 나흘, 열흘이 지나도 그 어린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고양이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마침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녀석은 꼬리가 댕강 잘려진 채로 다시 찾아와 주었다.

꼬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덜렁덜렁, 그야말로 덜렁덜렁 하는 꼬리를 어린 고양이 녀석은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무슨 덫에 걸렸다가 탈출한 것인가? 아니면 개구쟁이 아이들의 장난? 그것도 아니라면 고양이들끼리 영역 다툼을 하다가 당한 것인가? 우리는 다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보고 있었지만, 딱히 이거다 할 만한 결론은 내지 못한 채로 그저 열심히 어린 고양이의 먹을 것이나 챙겨 주고 있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때 고양이의 꼬리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곧 상처가 완전히 회복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고양이의 목줄과 방울을 떼어내 버리고 싶어 했다. 목줄과 방울이 고양이의 덫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엄연히 주인이 따로 있는 고양이의 목줄을 함부로 떼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속상해 했지만, 그렇지만 어쩔 것인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그녀였다. 어느 하루 보니 고양이의 목에서 목줄도 방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옆에서 그녀는 히히, 하고 작은 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양이의 목에서 방울을 떼버린 뒤로 녀석은 더 이상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녀석을 기다렸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났어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목에서 방울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한 목사님이 훈육 차원에서 고양이를 묶어놓았거나 가둬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달랐다. 고양이들 간에 분쟁이 생겨서 어린 고양이가 희생됐을 것이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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