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그가 그 소리를 들은 건 이른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 간밤에 친구를 만나 술을 한잔 한 다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덕이었는지 그는 이른 아침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질 않았다. 부엌에선 무엇을 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까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노모가 아침 준비를 하시는 모양이었다. 창호지가 발라진 문이 환하게 밝아져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이른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베니어 합판으로 잘 짜여진(그건 약 17-8년 전 그 집을 지을 때 아버지가 직접 짜신 것이었다) 문을 슬쩍 밀쳤다. 갑자기 눈이 부시어왔다. 햇살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도 해는 채 마당 건너편의 솔 숲 위를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이유는 금새 드러났다. 밤새 눈이 내린 것이었다. 유난히 희고 청아하다 싶게 맑은 눈.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약간의 바람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바닷내음을 싣고 불어오고 있었다. 잔잔하게 흩날리는 눈. 사람들의 기름으로 인해 번득거리는 마루로 나갔다. 언제 치웠는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마루는 마당과 직접 닿아 있는데 아무런 칸막이 없이 그냥 트여 있어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그 세례를 고스란히 맞곤 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준오는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했고, 그리고 눈이 저렇게 밝은 건, 밤새 자지 않고 세상을 비추던 달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눈부실 수 없는 것이라고. 아직 채 해도 뜨지 않았는데. 달빛을 머금은 눈. 군데군데 은하수의 가루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걸어서 바닷가를 나가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갑자기 날씨가 싸늘하게 느껴지면서 몸이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 바닷가까지는 기껏해야 10분 거리. 그리고 그 가는 길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었다. 간간이 내리는 눈 사이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 끝에 차가운 눈을 머금은 밀물 자락이 묻어 나왔다. 그들은 굳이 보지 않아도 보였다. 하얀 눈을 싣고 끊임없이 해변에 자신들의 분신을 남기는. 그 분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조물주가 만들어주는 양분을 보충해 조물주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듭날 것이다. 아니 이미 해변은 그 분신들의 외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준오는 오랜만에 그 장엄한 창조의 순간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단순히 날씨가 찬 탓이었다.

그리고 준오는 마당 한 가운데 뚫어 놓은 길을 통해 동네 어귀까지 나갔다 온 노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직후였던 것이다. 마침 할 일도 없고 지난 밤 마신 술 탓인지 노모의 성화에 어거지로 떠 넣은 밥이 소화가 잘 안 돼 눈이나 치워볼까 하는 생각에 막 마당에 나온 참이었다. 식사 후 옆집에 마실 나간다고 했던 노모가 마당 어귀를 들어서면서 중얼거리듯 한마디 던진 말, 바로 그의 전 인생을 바꾸게 한 그 말.

"누구라고요?"

"남순이랑게".

"남순이가 어쨌다고요?"

"아니 이눔이 귀까지 먹었나. 아 글쎄, 아이를 유산했다는데도…."

준오는 다시 묻지 않았다. 이미 노모의 첫 중얼거림을 들었고 그 순간 세상은 정지해 버린 것이다. 노모는 끝말에 죽음, 이란 얘기도 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인가. 아니 그녀가 죽었다는 소리였다. 유산을 했고 그걸 모른 채 끙끙 앓다가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에겐 영원이 되고 말, 첫 경험을 안겨주었던 그 여자.

그러고 보니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같은 해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무척 친하게 지냈던 친구. 그는 이곳 고향에 정착, 농사를 짓고 있다. 어제는 명절의 번잡함이 막 사라진 구정 이틀 뒤였다. 그와 4홉들이 소주 한 병을 가운데 놓고 산에서 잡아왔다는 토끼 고기를 안주 삼아 간만에 향수에 푹 젖어 있던 그 시간, 갑자기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준오야 서울생활 15년 동안 매일같이 듣는 거였지만 그 친구에게는 당연히 무척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이미 3홉 정도의 술이 들어가 얼큰해진 상태였는데도 눈을, 마악 입안으로 들어가 질겅질겅 씹히고 있는 토끼의 그것 모양으로 해가지고 무슨 일인가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준오가 한 말이었다.

"근디 이런 바닷가 벽촌에, 그것도 눈발 날리는 한 밤중에 깽깽이 소리 들린다는 건 참말로 안좋은 일인디."

친구는 마치 서울 하늘에 공습경보라도 울려 퍼지는 듯한 불안감이 여전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준오의 선수로 술잔은 이어졌고 잠시간 계속되던 앰뷸런스 소리도 부는 바람에 요동치던 전깃줄 울음 사이로 사그라졌지만 준오도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녀는 언제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일까. 왜 사람들은 준오에게 그녀의 행방에 대해 한마디도 얘기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세찬 물보라가 일었다. 이제 적응이 돼 하이얀 세상에 잘도 순응하던 눈 속으로 시리디 시린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은 그대로 현기증이었다. 아찔. 들고 있던 빗자루 떨어지는 소리가 멍하던 그의 귀에 마치 무슨 지진이 일어난 마냥 들려왔다. 그 진동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간이 내리던 눈은 주위를 뱅뱅 맴돌며 그의 의식을 희롱했다. 구토가 일었다. 노모가 깜짝 놀라 내달아오셨다. 무얼 아시겠는가. 무얼 짐작이나 하시겠는가. 눈 쌓인 측백나무 마른 사이로 그녀의 오롯한 초가집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마음속에서 하얗게 쏟아지던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나신도, 물결치던 그녀의 설익은 젖가슴도, 모두 무너져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는데, 전혀 찾지 못한 세월이었지만 항상 찾고 있던 세월이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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