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양이

 

텃밭에 양파를 심고자 삽질을 하는 중인데 어디서 야으,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소리를 연상케 하지만 고양이 소리와는 영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어 좌우를 살펴보니 국화꽃 사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한눈에 척 봐도 어리다. 어리고 야위었다. 고양이 특유의 매끈한 털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어미의 젖이나 몇 번 빨아본 게 전부인 것처럼, 눈은 쑥 들어가고 피골은 상접하고 털은 제멋대로 헝클어진 것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데 어쨌든 아직은 살아서 움직인다. 움직이던 중에 나를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해 달려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살려줘서 고맙다고 재롱을 핀다.

 

죽기에 좋은 곳을 찾다가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은데 혼자서는 죽음도 뜻대로 안 되어서, 그래서 나를 보는 순간 자신의 목숨을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낯선 나를 피하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쓱쓱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쩔 것인가. 손에 든 삽을 땅에 박아놓고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어 보았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질러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리 야으, 처음 들었던 그 이상하게도 애달픈 느낌의 소리를 잇달아 토해내면서 녀석은 내 손에 들어와 주었다. 낯선 냄새를 탐색하는 과정도 없이 금방 내 손에 잡혀줘 버리는 고양이 녀석이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일단 경계태세부터 취하는 게 고양이들이건만 이 녀석은 통째로 아예 자신을 내게 맡겨버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이게 보통 신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산다는 것이 두려워서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인가? 아니면 산다는 것이 신기해서 호기심으로 아무에게나 안겨보는 것인가. 어쩌면 배가 너무 고파서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는, 우리는 또 한 마리의 고양이를 거두는 입장이 되었다. 금년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이즈음은 고양이 전문가가 돼버렸다는 느낌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고양이를 들여다본 것은 물론 아니다. 고양이가 자꾸 내 곁으로 와서 나를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게 아마 옳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영양상태가 매우 불량하거나 꼬리가 잘려지는 등의 상처 입은 어린 고양이들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고양이들은 정분이 제대로 붙었다 싶으면 우리의 곁은 떠나버렸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버림 받고 상처 입은 어린 고양이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원기를 회복한 다음 자신의 갈 길을 찾아 떠나는 것만 같다. 뭐가 어떻게 돼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우리는 아직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혹시 우리 집이 고양이들의 요양원이라고 고양이들 간에 소문이라도 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나 가끔 해볼 뿐이다.

 

▲ 죽음을 넘어선 직후에...

 

“사람만 뉴스를 활용하는 건 아닐 테니까, 응? 고양이들도 고양이 세계의 뉴스가 있을 테니까, 응? 저기 어디에 가면 우유도 주고 생선도 준다 하는 뭐 그런 뉴스가 고양이들 사이에 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응?”

내 옆의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하고 신이 나 죽겠는 모양이었다. 눈을 잇달아 깜빡깜빡해대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실실 흘려대면서, 가끔은 고개도 갸웃갸웃해대면서 동의를 구하고 있는 순간의 그녀는 그야말로 행복에 잔뜩 아니 푹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꼭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맞아,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는 소리를 나는 의무적으로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맹랑한 사태를 일러 옛 사람들은 아마도 아전인수요 자가당착이라고 했던 것이겠지만, 자가당착이나마나 어쨌든 뭐 그렇다. 우리가 헐벗은 고양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었다는, 할 수 있다는, 고양이들이 우리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다는 증거는 없다 해도, 찾아온 고양이를 우리가 문전박대하지 않고 즉각 받아들였고 이에 고양이들의 영양상태가 매우 좋아졌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 하나만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사실이다.

뿌듯함이라는 거, 인생살이에서 이것만큼 미세하면서도 거대한 보물이 또 있을까 싶은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보물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모두가 내 옆의 그녀, 그녀의 작품이었다. 내가 만일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처럼 혼자서 하늘이나 쳐다보는 삶을 붙잡고 있었다면 나는 아마 헐벗은 고양이에 대한 연민이고 뭐고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관심은커녕 귀찮다고, 재수 없게 어인 비루먹은 고양이 따위가 내 집 마당을 기웃거리느냐고 돌멩이라도 던져 내쫓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 생강 밭에서 두더지를 잡겠다고 어슬렁 거린다.

 

그녀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작고 허약하고 상처 입은 또는 학대 받는 존재들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 발에 밟힌 작은 꽃이라든가 벌레 같은 것을 발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든 살려내고자 애를 썼고, 거리를 걷다가도 영양상태가 좋은 동물을 발견하면 예쁘다, 귀엽다, 등의 간단한 평론을 하고 말지만 수척한 느낌의 작은 동물을 발견하면 자기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인가도 잊고 달려가서 쓰다듬는 등의 애정공세를 펴곤 했다. 그런 사람이니 마당으로까지 들어온 상처 입은 어린 고양이의 보호자를 자임하고 나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어머, 어머, 이 녀석 꼬리가 왜 이래? 목에 방울은 또 뭐고?”

꼬리 잘린 어린 고양이가 허기진 모습으로 목에 방울까지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자체를 하나의 농담으로 여겼었다. 농담이긴 하지만 너무 엄숙해서 함부로 웃을 수는 없었다. 꼬리가 잘렸다는 것과 허기진 모습 그리고 목에 달린 방울, 이 세 가지 현상을 도대체 어느 문법으로 꿰맞춰야 하는지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소리만 되풀이하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목에 방울이 달렸다는 것은 관리자가 있다는 얘기인데 꼬리가 잘린 것은 또 뭔가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비극적 희극을 볼 때의 그것처럼, 어이가 없어 웃다가도 소름이 돋는 진실성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숨소리마저 죽여야 하는 시간을 그날 꼬리 잘린 어린 고양이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쯤 뒤에, 우유와 생선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날름날름 뛰는 등의 재롱을 부리기 시작하던 녀석은 어느 하루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고 섭섭해 하며 우울증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즈음 녀석은 다시 나타나 주기는 했지만, 새로운 방울을 목에 달고 나타났던 녀석은 마치 그 새로운 방울을 우리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탈출해서 잠시 들렀던 것뿐이라는 듯이 돌아간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단언컨대 우리는 녀석을 소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먹을 것은 챙겨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녀석이 주인을 따로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녀석을 잊지 못하고 틈만 나면 화제로 삼곤 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녀석이 우리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보면서도 미처 못 보고 지나쳤던 녀석의 특징이라든가 성격 같은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우리는 사뭇 그리움의 포로가 될 지경이었다.

 

▲ 외눈박이 어린고양이의 외출

 

그녀는 혹시 언제라도 녀석이 찾아오면 먹으라고 녀석이 먹던 밥그릇을 채워놓곤 했다. 그것을 주변의 다른 고양이들이 와서 먹어치웠다. 우리는 그 중에 한 녀석과 새로운 친교를 맺고자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꼬리 없는 고양이이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애달픈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이미 고양이는 이러저러하다는 식의 선입견을 갖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가 새롭게 친교를 맺고자 했던 노란 고양이는 꼬리 없는 녀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생강을 심어놓은 텃밭에서 두더지를 잡겠다고 앞발을 가만히 내미는, 앞발을 내민 채로 한참을 죽은 듯이 서 있다가 어느 순간 나비처럼 가볍고 사뿐하게 도움닫기를 하며 튀어 오르는 녀석의 유연한 몸놀림을 보면서 “야아 저것 참 예술이다”하는 식의 감탄사를 토해내기도 했지만, 대체로 봐서 녀석은 여우처럼 날렵하고 눈치가 너무 빠른데다가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음모의 냄새가 풍긴다는 느낌이어서 그리 정나미가 붙지를 않았다.

우리의 그런 심사를 알아차렸는지 녀석은 사나흘쯤 정기적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하다가는 뚝,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이틀인가 사흘인가 지난 오후에 한쪽 눈이 없는 검은 고양이가 마당으로 찾아왔다. 녀석은 오른쪽 눈 하나가 감겨져 있을 뿐 영양상태가 불량하지는 않았다. 눈에서 진물 같은 것이 흐르지도 않았고, 드러나 보이는 뼈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돌았다. 빗질을 자주 하는 여학생의 머릿결처럼 단정하게 한쪽으로만 쏠려 있는 털이 녀석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녀석은 잠시 주인의 품을 벗어나 마실을 나와 있는 것일 뿐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병자가 아니었고 노숙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꼬린 잘린 옛 고양이나 추억하는 다소 쓸쓸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녀석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쥐를 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쥐만 잡아서 먹어야 한다고 주인이 밥도 안 주고 그래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목숨이나 겨우 붙어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 별 쓸데없는 상상에 빠져 씁쓸한 미소나 짓기를 며칠이나 했을까. 어느 하루 저녁 무렵 다리와 배는 하얗고 머리와 등은 까만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토방 밑에 축 늘어져 있었다.

 

▲ 꼬리 잘린 고양이의 새로운 삶

 

한눈에 척 보면 죽은 것 같았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너 누구냐? 하고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자 녀석은 발딱 일어나서 앉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학대를 얼마나 당하다가 탈출해 왔는지 녀석은 생면부지의 우리를 발견하고서도 마치 그게 일상이라는 듯이 그냥 멀뚱할 뿐이었다. 털에 윤기는커녕 삐죽삐죽 송송이 곤두선 채로 엉켜 있는 것이 제 몸 하나 간수할 여력조차 쇠진해 버린 지도 하루 이상은 지난 것 같았다.

쓰러져서 숨이나 겨우 쉬고 있는 녀석의 입을 벌려 우유를 두 숟가락 정도 먹였더니 십 분도 안 돼서 죄다 토해내 버렸다. 사람이 먹는 우유를 생으로 고양이에게 줘서 토하나 보다, 하고 끓여서도 줘봤지만 녀석은 그 또한 토해내 버렸다. 생선을 살코기로만 잘게 찢어서 코앞에 대주니 녀석은 바로 이것이라는 듯이 금방 다 먹어치웠다. 하지만 그 또한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다 게워내 버렸다. 뭐냐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뭔가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미 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뭔가의 정체가 무엇이건, 우리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슬퍼할 준비도 이미 끝나 있었다. 네가 뭔데, 뭔데 응? 왜 하필 우리 집에 와서 죽으려고 하는 거야 인마,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금방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말을 꾹 눌러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 녀석이 아무래도 약 먹은 쥐를 먹고 헤매던 중인가 보다 이거, 응?”

어느 순간 내 입에서 불현 듯 그런 소리가 나왔다. 생각을 해보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불쑥 그런 말이, 생각이 터져 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쥐약을 먹어서 비실비실한 쥐를 고양이가 잡아서 먹었거나, 이미 죽어 있는 쥐를 허기진 고양이가 허겁지겁 먹어대고 나서 뱃속이 뒤틀리는 등으로 고통스러우니까, 여기 저기 아무 데나 헤매던 중에 우리 집 마당으로까지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 이 녀석과는 끝내 친교를 맺지 못했다.

 

저 먼 옛날 유, 소년기에 약 먹은 쥐를 먹고 데굴데굴 뒹구는 개를 더러 보아온 나는 해법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에 어른들은 약 먹은 개의 입을 억지로 벌려 소금물을 먹인 다음 축축한 흙바닥 위에 눕혀놓곤 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전통에 충실한 선무당이 최신 과학을 앞서기도 하는 법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방법 그대로, 고양이를 축축한 흙바닥에 눕혀놓기로 했다. 그녀는 당연히 무슨 그런 법이 다 있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결국은 수긍해 주었다.

“눈 딱 감고, 이불 뒤집어쓰고 한나절만 있어 보자. 응?”

그녀가 나의 그런 생각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고 동의한 이유는 그녀 자신에게도 그와 유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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