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양이

 

흙바닥 위에 마치 내동댕이쳐진 듯이 아무렇게나 눕혀져 있었던, 거의 시체나 다를 바 없었던,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낯선 고양이는 결국 살아나 주었다. 그 시간이 아마 길면 세 시간이요 짧으면 두 시간여 쯤이었을 것이다. 앞발이 꿈틀거리고, 눈곱과 함께 꾹 감겨져 있던 눈꺼풀이 무엇을 탐색이라도 하듯이 조금씩 조용히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아 다행이다, 하고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 텃밭에 나와서 산책하는 중?

 

우리가 이겼다. 우리의 생각이 옳았다. 아니다 참, 그 생각은 엄격히 말하자면 우리의 생각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윗세대의, 조상들의,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지혜가 압축되어 우리의 가슴에 심어져 있다가 그날 그 시간에 때가 되었다 하고 마치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새싹이 나오듯이 발현된 것일 뿐이었다.

흙은 보약이다. 보약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흙은 보물이다. 보물은 마땅히 아끼고 보호하며 함부로 탕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세상 천지에 널린 것이 흙인데 보물은 무슨 보물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 또한 세상 천지에 널려 있지만 각자가 귀한 이치와 같다고 말해줘라.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서당 훈장님을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씀을 참 많이도 들었다. 지금도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황토방이다 뭐다 상업적 이익을 목적으로 콘크리트 위에 흙을 덧칠하는 사람들 외에는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탓에 그리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또한 흙을 최상위급 물질로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그야말로 미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흙을 보약이라고 여기기는커녕 마당에 잡초가 많다고, 비가 내리면 도랑이 파인다고 콘크리트로 흙을 싹 덮어버리는 게 유행인 시대에 쥐약 먹은 쥐를 먹고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양이를 흙 위에 눕혀놓고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까? 미쳤거나 말거나 사람은 교과서를 통해 배운 것보다는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나 이웃집 할머니의 언행을 통해 배운 것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다닌다는 생각도 없이 간직하고 다니다가 특정한 어떤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면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활용해보기 마련이다.

 

▲ 처음 나타났을 때의 야옹이

 

내가 사춘기를 통과하고 청년 소리를 듣던 즈음에 충격적인 한 사건이 있었다. 육촌 형이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거품을 마구 뿜어내며 뒹굴다가 네 발로 벌벌 기다가 벌떡 일어서서 방방 뛰다가 다시 데굴데굴 뒹구는 등 그야말로 지랄발광을 하는데 그에 대응하는 당숙모의 자세가 참으로 특이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아들에게 그 어머니가 한 일이라곤 기껏 소금물을 억지로 먹여서 더 많은 것을 토해내게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는 흙바닥 위에 눕혀놓고 당신은 그 어떤 모진 결심이라도 하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입은 꾹 다문 채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날 육촌 형이 만일 깨어나지를 않고 잘못 됐었다면, 잘못 되지 않았다 해도 병원 같은 데로 실려 간 뒤에서야 깨어났었다면 나는 아마 그 뒤로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오늘날 약물에 중독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양이를 흙 위에 눕혀놓겠다는 생각 따위는 차마, 감히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우유를 먹이면 우유를 토해내고, 생선을 먹이면 그 또한 죄다 게워내 버리고 축 늘어진 채 금방 죽어버릴 것만 같은 고양이를 보면서 문득, 불현듯, 흙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우리가 이거,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네, 흙 위에 눕혀놓자.”

“흙? 여기 이런 흐-윽?”

내 옆의 그녀는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다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삼십 초도 안 돼서 내 말의 뜻을 이해하고 수긍해 주었다. 흙과 관련된 그녀 자신의 어렸을 적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내가 육촌 형을 통해서 간접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간접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이었다. 그녀의 나이 일고여덟 살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하루 낮잠을 자던 중에 연탄가스를 얼마나 많이 마셔버렸는지 그녀는 회전목마라도 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온 방안을 벌벌 기어 다니다가 외삼촌과 엄마에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무정하게도 엄마와 외삼촌은 그녀를 끌어내다가 마당에 눕혀놓고 무슨 다른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 꽃길을 산책하는 야옹이

 

그녀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방점은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무정, 혹은 야속함에 찍혀 있었다. 흙바닥 위에 눕혀진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은 아직 그녀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귀하지 않게 천덕꾸러기처럼 자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귀하지 않게 자란 이유는 그녀의 해석을 따르자면 큰딸, 둘째딸, 셋째딸, 넷째딸, 그리고 다섯째딸 그렇게 딸만 연달아 태어난 집안의 다섯째딸이었기 때문이었단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해석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나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나 또한 버림받은 존재라는 식의 섭섭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육촌 형은 오녀 이남 칠남매 중에 세 번째로 태어난 이른바 장남이었다. 당숙모의 아들 사랑도 그 누구에 못지않았다. 그런데도 연탄가스에 중독된 아들을 마당에 눕혀놓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줄담배나 피우고 있었다.

두 가지 사례를 손꼽아 헤아려 보면 삼십오 년 내지 사십여 년 전이니까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대로 확고한 저마다의 믿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지역은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니까 많이 다르지만 믿음의 성격은 정확히 같았던 셈이었다. 지금처럼 병원과 의사라는 낱말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시절이라면 당연히 그런 믿음은 지탄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 시절의 농촌에서 병원과 의사는 부자들의 곳간에 쌓아놓은 이상하고 신기한 존재로나 여겨졌을 뿐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전통이다. 새로운 것은 결과도 불확실하면서 돈을 요구하지만, 전통은 돈을 요구하지도 않고 결과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도 없다. 믿음이 있으니 오히려 안심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전통은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의 내부 어딘가에서 나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경험이 쌓이고 농축돼서 몸에 새겨진 그것은 마치 언어와도 같아서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마련이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것, 미신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는 그런 믿음의 시대를 어쩌면 마지막으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는 우리의 어린 시절은 행복과 불행의 구분이 거의 무의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물론 흙이 보물이다 하는 식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시대는 아니지만, 우리의 몸에는 아직 옛 어른들의 그런 언행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굳이 생각하려 해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어떤 상황이 눈앞에서 전개되면 자동적으로 그것이 일어나서 이렇게 해봐, 이렇게 해봐, 하는 것이다.

 

▲ 야옹이는 이것을 보고 환장하지만...

 

만약에 흙바닥 위에 눕혀놓은 고양이가 살아나지 않고 잘못 됐다면 나는 아마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지도 못했겠지만, 흙의 기운으로 살아난 건지 아니면 때가 되어 살아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해도 어쨌든 고양이는 살아나 주었다. 희미하게나마 눈을 뜨고 꿈틀, 꿈틀, 힘겹게 꼬리를 흔들어주는 고양이를 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꼭 그런 것이었다. 대체 이 녀석이 어디서 왜 우리 집으로 와서 우리를 느닷없는 긴장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더란 말인가.

“왜 이렇게 부실한 고양이가 우리 집으로 자꾸 찾아드는 거야?”

“그러게. 진짜 그러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질문 하나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코카콜라 병처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는 눈을 잇달아 깜짝깜짝 해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허헛 참, 소리를 연발하며 이마에 내천자를 수도 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꼬리 잘린 어린 고양이에 대한 추억이 아직 남아 있는 우리에게 영양실조로 빈사상태에 빠진 어린 고양이의 불시방문은 아무래도 예사로울 수가 없었다.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느낌이었다.

그날 밤의 꿈자리는 매우 어지러웠다. 꼬리가 잘린 채로 찾아와서 원기를 회복한 뒤에 떠나버린 어린 고양이와 새로 찾아온 빈사상태의 어린 고양이가 나란히 피를 철철 흘리며 산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금방 호랑이로 변신해서 주변의 모든 고양이를 잡아먹는 그야말로 개꿈에 시달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보니 그녀 또한 고양이 꿈을 꾸다가 깨었다면서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꿈자리는 그렇게 어지러웠지만 죽다가 살아난 검은 고양이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랬다. 녀석은 깨어난 뒤에도 자기가 살던 과거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집 마당을 자신의 새로운 터전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산재한 시골 집 특유의 온갖 구석을 녀석은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고 있었고,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새들을 쫓아내고 오는가 하면, 연못가를 빙빙 돌면서 물고기를 긴장시키는가 하면, 연탄창고로 들어가서 쥐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기도 했다.

 

▲ 불청객의 방문

 

 

게다가 녀석은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한 사람이 움직이면 반드시 뒤를 따라나서는 집요한 친근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가고 있었다. 텃밭에 대파 하나를 뽑으러 가도 낼름 뒤를 따라오고, 쓰레기를 태우러 나가도 후딱 뒤를 따라 나서는 등 그야말로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야옹, 야옹 소리를 내는데 그것 참,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어대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내심 각오는 하고 있었다. 꼬리 잘린 어린 고양이가 그랬듯이, 새로운 이 녀석도 조만간 인사도 없이 우리를 떠날 것이다. 떠나는 고양이를 원망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그러자. 고양이를 우리의 소유로 간주하지는 말자. 우리가 비록 자본제일주의 세상을 살고는 있지만, 최소한 그 정도로까지 망가져 버리지는 말자. 그러므로 우리는 녀석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고 그냥 야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야옹아 이것 먹어, 야옹아 이리 오렴, 그렇게 야옹아, 야옹아, 하고 있는 동안 야옹이는 자연스럽게 검은 고양이의 이름이 되어갔다.

야옹이는 틈만 나면 방안으로 들어오고자 했지만, 우리는 고양이를 방으로 들이는 것만은 절대 금지하는 원칙을 세워놓고 철저하게 지키기로 했다. 머리카락 하나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 자신의 체질적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녀석이 어느 날 돌연 인사도 없이 사라질 경우를 대비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 대신 우리는 야옹이가 자연 상태에서 고양이의 본래적 특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적극 응원하고 후원하기로 했다.

어린 고양이 야옹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아마 이십여 일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텃밭에 심은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야옹이 녀석도 우리의 주변에서 혼자 뒹굴다가 사마귀를 발견하고 쫓아다니는 등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때쯤 야옹이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돼 있었고, 애티를 벗어나서 제법 청소년 티를 보이고 있었다. 야옹, 할 때의 소리는 여전히 가냘프게 애처로웠지만, 무엇이든 표적을 잡고 응시하고 있을 때의 눈빛은 이미 어른이요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 감나무에 올랐다가 혼이 난 뒤에...

 

그런 사냥꾼의 눈으로 감나무를 응시하던 야옹이 녀석이 갑자기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감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포복절도할 만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감나무 위로 뽀르르, 후딱, 올라가기는 날렵하게 잘 했는데 뒤돌아서 내려오는 방법을 녀석은 아직 몰랐다. 머리를 위로 향한 채 고개를 돌려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몸을 돌려서 내려오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 애가 타는지 녀석은 계속 낑, 낑 소리만 내는데 아무래도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느라 칭얼대는 것 같았다.

나는 야옹이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내려올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자 했지만, 나의 그녀는 굳이 달려가서 야옹이 녀석을 두 손으로 안아 내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딱 그만큼이 차이가 있었다. 딱 그만큼이기는 하지만, 그 미미한 차이는 때로 거대한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를테면 그녀는 우유를 주문하는데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먹일 목적에서이다. 또한 그녀는 내가 먹을 목적으로 구워놓은 생선을 슬쩍 한 토막 빼내다가 고양이에게 줘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이 처음 한두 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식으로 넘어가지만, 반복되고 보니 이게 참, 나 자신이 문득 찌질해 보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은근슬쩍 속이 상하는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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