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대담> “극심한 부정부패의 시대, 다산으로 돌아가라”: ‘차왕’ 연세영 작가 &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1회

연일 고위 공무원, 기업가, 정치인들을 둘러싼 부정부패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총체적 위기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경세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떠오르는 이유다. 다산은 당시 “온 세상이 썩은 지 오래다.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고 개탄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8일 본지는 다산연구소를 찾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 좌담은 최근 퓨전대하소설 ‘차왕’(명에디터)을 출간한 연세영 작가와 박석무 이사장이 대담을 나누는 자리다. ‘차왕’은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픽션물이다.

 

▲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박 이사장은 인터뷰에 앞서 실천과 행동이 없는 학문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다산은 이미 유네스코 기념 인물로 등재된 상태. “다산이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생각한다”는 연 작가의 말에 박 이사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공학, 토목, 건축, 아동학, 상담, 군사, 의학에 이르기까지 손을 안댄 곳이 없다”며 한마디로 ‘천재’라고 했다.

현대인들이 다산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과 관련 박 이사장은 “(다산의) 덕목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무엇보다 실천하는 행동,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았다는 점이다. 탁상에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바람직한 정책이 있다 하더라도 행동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또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백성, 곧 국민의 마음과 삶이 편하지 않으면 그 역시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자기 사욕을 버리고 공익에 부응해야 사회가 부패하지 않습니다. 즉 개인이 부패하면 개인이 망하고 결국 나라가 부패하게 됩니다. 신라, 로마도 나라가 부패해서 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패를 막는 결정적인 해답은 무엇인가. 바로 실천에 있습니다. 탁상공론이 아닌 의지를 갖고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면 됩니다. 다산처럼 해보면 됩니다.”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 평전’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다산 기행’ ‘다산 정약용의 일일수행’을 저술한 최고의 다산 전문가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에서 18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행정가·학자·정치가로도 폭넓게 활동해왔다. 다음은 연세영 작가와 박석무 이사장의 일문일답 내용 전문이다. 대담 진행은 한성욱 선임기자가 맡았다.

 

▲ 자신이 직접 쓴 '다산 초당' 글귀를 박석무 이사장(왼쪽)에게 주는 연세영 작가

 

연세영: 이사장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석무: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젊은 분께서 다산 정약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세영: 이사장님은 언제부터 다산에 매료되셨는지?
박석무: 1970년 정도로 기억합니다. 대학원생 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46년 정도 됐습니다. 대학원 시절 아는 교수 한분이 제게 ‘조선법제사’ 연구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아사미 린타로의 동경대 박사 학위논문인 ‘조선법제사고’를 읽게 되었는데 그 논문이 다산 선생의 ‘경세유표’연구였어요. 그렇게 첫 걸음을 떼게 됐습니다.

 

 

연세영: 저는 개인적으로 다산을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생각하는데요?
박석무: 충분히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정약용의 지식과 식견을 따를 자는 없었던 거로 생각합니다. 종목별로 봐도 엄청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공학, 토목, 건축, 아동학, 상담, 군사, 의학에 이르기까지 손을 안댄 곳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전 세계 문화계에서는 다산의 명성을 알고 유네스코 기념 인물로 등재했고요. 

 

 

연세영: 현대인들이 다산에게 배워야할 덕목은 무엇이 있을까요?
박석무: 덕목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무엇보다 실천하는 행동,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았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탁상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바람직한 정책이 있더라도 행동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백성, 곧 국민의 마음과 삶이 편하지 않으면 그 역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다산은 수원성 축조 때 거중기와 녹로, 누거 등을 중국에서 들여와 실제 사용했습니다. 이는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깊은 혜안이 깔려 있습니다. 현대식 농기구의 제작과 보급은 바로 백성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발명품이었으니까요. 

 

 


연세영: 다산의 저서는 몇권 정도 되는지요?
박석무: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포함해 약 500여 권 되는데 한 인간이 출간하기엔 방대한 분량입니다. 실로 집념의 투혼으로 책을 짓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재로 따지면 권당 약 130페이지 정도 되는데 당시 책의 모양을 볼 때 알차게 만들어졌습니다.  

 

 

박석무: 이번에 연세영 작가께서는 소설을 내게 됐는데 어떤 과정을 밟았습니까?
연세영: 햇수로는 약 6년 정도 준비를 했구요. 전깃불을 다 끄고 조명 스탠드 한 개만 켜고 양반다리로 앉아 글을 썼습니다. 호롱불에 초가집은 아니지만 집필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재현해보고자 한 것이지요.

 

 

 


박석무: 왜 ‘차왕’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연세영: ‘차왕’- 차를 제일 잘 만드는 사람이란 뜻이 기본적으로 있구요. 무엇보다 차를 들꽃, 민초로 생각했습니다. 백성 곧 국민이 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연세영: 다산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건 언제부터인가요?
박석무: 기본적으로 온건한 성품이었구요. 무엇보다 다산이 어명으로 33세때 암행어사를 하게 되면서 백성들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 했다고 생각합니다.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치우치지 않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특히 다산은 정조의 인척되는 사람이나 주변의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차별을 두지 않고 벌을 내렸습니다. 인간적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다산은 주저 없이 했습니다.

 

 

연세영: 다산의 집안이나 형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박석무: 다산의 집안은 한마디로 뼈대 있는 가문입니다. 다산의 부친은 당시 진주목사를 지냈고 조상 대대로 벼슬을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다산은 형조참의와 병조참의, 형인 약전도 병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직급이나 직책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산은 정조가 높은 관직을 줄 때마다 사양했고 큰상을 내리겠다고 했음에도 그 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청렴하고 올곧은 공무원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석무: 연 작가는 ‘차왕’이란 책을 어떤 마음으로 출간했습니까?
연세영: 조선시대 때의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현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에도 현대판 탐관오리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온갖 부조리, 금품 뇌물을 받고도 호의호식하는 일부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일침을 가해보자는 의미로 만들었습니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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