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대담> “극심한 부정부패의 시대, 다산으로 돌아가라”: ‘차왕’ 연세영 작가 &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2회

<1회에서 이어집니다.> 

▲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연세영: 제가 책을 지으면서 느꼈던 것은 정약용이 조선의 천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이나 이순신, 기타 위인들에 비해 사회적 조망이 다소 적었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다고 보시는지요?
박석무: 정약용은 남인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주류는 노론 벽파였구요. 결국 노론은 다산의 개혁정신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형 정약종이 동생은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고백했고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명백하게 나왔음에도 다산을 천주교인으로 낙인을 찍어 귀양을 보낸 것이지요. 다산이 귀양 살면서 몇 번의 해배가 있었지만 노론파들이 막았습니다. 18년간의 귀양살이라는 것은 정치생명을 끊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세영: 그렇다면 정약용은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석무: 이미 다산은 정조에게 자명소를 올렸을 무렵부터 천주교를 멀리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산은 조상을 모시는 일과 제사는 지켜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천주교와 노선이 달랐던 것이지요.

 

 

연세영: 다산이 금정찰방을 할 때 천주교를 박해했나요?
박석무: 천주교를 박해했다는 것보다는 천주교도들을 믿지 않도록 교화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선처했다고 합니다. 천주교도인 이존창이 그 좋은 예인데요. 천주교의 핵심세력이었던 이존창을 말로 타일러 교화시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연세영: 다산이 천주교인이라는 얘기가 나돌 때도 정조는 다산을 추궁하지 않고 지키려 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정조가 정약용을 아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박석무: 조선에 이런 천재는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미 20대에 시험을 볼 때도 두각을 나타냈었고 완벽한 배다리공사, 수원성 축조로 인한 4만 냥 절약, 암행어사 시절 때 탐관오리들을 벌하는 것 등을 지켜보면서 조선의 보배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개혁적인 이념과 진취적인 생각이 정조와 같아 어떤 일이든 다산에게 맡겼습니다.   

 

 

연세영: 당시 다산은 해배 이후 다신계를 만들어 친목모임을 잘하라고 당부했었는데 현재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나요?
박석무: 다산의 사후 몇십 년간은 잘 진행되었다고 보는데 지금은 다소 모임이 덜한 것 같습니다. 당시 다산 소유의 땅도 자취가 없어져 버렸구요. 다산의 정신과 이념 그리고 친목은 현재의 우리가 다시 이정표를 세워 잘 꾸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목모임도 좋지만 다산에 대한 연구와 보존, 그리고 다양한 문화축제가 열려야 한다고 봅니다.

 

 

연세영: 다산이 백성을 생각하고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지요?
박석무: 암행어사 시절의 일화는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백성을 위하는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 군수로 부임했을 때 얘기입니다. 당시 이계심이란 민란을 일으킨 장수가 잡혔는데 다산은 이계심이란 자를 곧바로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이계심이 왜 민란을 일으켰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산은 이계심의 탄원서를 본 후 그를 석방했습니다. 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와 백성들의 울분을 참고한 것이지요. 그 당시 파격적이었지만 요즘에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연세영 작가(사진 안)가 6년간에 걸쳐 집필한 저서 '차왕'. 다산 정약용 선생 일대기를 소설화했다.

 

 

연세영: 다산연구소는 어떤 곳인가요?
박석무: 여러 사업이 다 중요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청렴 정신, 공직 윤리 같은 다산의 본뜻을 이해시켜 주는 강좌를 여는 데 가장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 달에 최소 두세 번은 외부 초청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또 시·군·구 기초자치단체별로 다산의 목민정신에 가장 투철하게 행정을 펴고 있는 분들을 골라 다산목민대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방자치를 발전시키려면 특히 청렴하고 깨끗한 행정을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다산 선생 기일에는 묘제를 지냅니다. 해마다 500~600명씩 참석합니다. 다산음악회도 엽니다. 다산은 음악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좋은 음악이 나오면 좋은 정치가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연세영: 사업비는 어떻게 마련하고, 꾸려 가는데 어려움은 없는지요? 
박석무: 외부지원을 받는데 갈수록 그것도 어려워져서 지원받을 데를 물색하고 있는데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이 연구소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현 정부에서도 문화단체라든가 학술단체에 대한 구체적 배려라든가 지원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같은 학술단체뿐만 아니라 출판계도 문제입니다. 책이 안 팔리니 책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죠. 이대로 가다간 한국 출판계가 고사될 것입니다.

 

 

연세영: 부정부패에 대한 말들과 몰염치한 인물들이 최근뉴스에 거론되고 있습니다. 부패에 대한 다산의 이념을 알려주시지요. 
박석무: 부패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청렴해지면 됩니다. 자기 사욕을 버리고 공익에 부응해야 사회가 부패하지 않습니다. 즉 개인이 부패하면 개인이 망하고 결국 나라까지 부패해서 망하게 됩니다. 신라 로마도 나라가 부패해서 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패를 막는 결정적인 해답은 무엇인가. 바로 실천에 있습니다. 탁상공론이 아닌 의지를 갖고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면 됩니다. 다산처럼 해보면 됩니다. 다산이 어떻게 했는지 연구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연세영: 강진 유배시절 홍임모녀가 등장하는 한시 ‘남당사’에 대한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박석무: 제 ‘다산평전’에도 짤막하게 언급하긴 했습니다. 윤씨 집안의 어떤 분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데 전하는 말로 다산이 당시 “홍임모녀를 잘 부탁하네”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홍임의 모친인 홍임모는 당시 소실인지 어떤 동네의 여인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산이 그런 말을 했으므로 다산과 연관이 있는 건 맞다고 보는데 사실 유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소실제도나 첩 제도는 묵인되는 상황이었고 공공연한 일이었기에 탓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홍임모의 자손들이 없다는 겁니다. 분명 그 지역이니까 뿌리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제 생각으로는 자손들이 강진 지역을 떠났거나 요절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산과 어떤 여인에 대한 얘기인 ‘남당사’는 최근에 밝혀진 내용인데 앞으로 더 자료가 나오게 되면 그에 대한 연구가 따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세영: 올해 진행되는 일정이 있으시다면?
박석무: 올해도 ‘실학기행 2016’를 다산아카데미에서 진행합니다.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일정인데요. 남양주 다산생가, 수원 화성, 성호 기념관, 반계 유적지, 흑산도 자산문화관, 강진 사의재 다산초당 등을 탐방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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