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서울, 백석을 읽다’ - 5회

(詩)

녯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통영’, 백석. -

 

 

(1)

▲ 시인 백석

어떨 땐 억울했을 것이다. 시간은 가만히 놓아두면 흘러가니까.
그래서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옛날의 이름을 입 안에 넣고
혀끝으로 굴리던 나날들도 그만 두기로 한 것이다. 이젠 피곤했고
아침에 햇살을 맞으며 몸을 일으키기에도 개운할 수 없다.

그랬지.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입시를 마치고 난 해 겨울에 바다를 보러가겠다고 통영으로 떠난 때를 떠올렸다.
바다는 얼어붙을 추위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고
나는 두꺼운 솜옷을 걸치고서도 춥다고 배낭을 끌어안았다.
막회에 소주를 하고 싶었겠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얇은 지갑이었다.
그렇게 배부르도록 바다를 들여다보고
차갑게 서리는 입김에 옛날이란 옛날은 모두 씻어내던 것이었다.

소리 내서 울고 싶었다.
울 때마다 온갖 소리를 틀어막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숨이 배꼽 위에서 갇혀 맴도는 소리가 그것을 대신하고는 했는데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차갑게 눈발이 내려앉은 술잔을 들이켜면 내 얼굴은 따뜻한 마루방처럼,
가을은 길지 않아 곧 옛날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가을도 없는데
겨울을 추억한다, 그것은 옛날이지만 곧 다가올 일이기도 한.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인어가 통영의 바다 위로 풀쩍 뛰어 올랐다.

나는 가라앉는다.
옛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다.

 


(2)

옛날의 일들은 너무 쉽게 기억 속에서 잊히는 기분이다.
사진으로든, 어떤 기록의 형태로든 남겨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떠올리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사진을 찍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장소나 사람을 사진으로 찍어두면
그것들이 그 순간부터 흔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만나거나 특별한 장소에 있을 때
두 눈으로, 또는 껴안고 만지고 입 맞추면서 느꼈던 별빛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빛을 잃은 별이라도 모아야 하는가.
바다에 떨어진 운석을 줍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 남겨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것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새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늙고 병들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추억거리에
나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바스락거리는가.

남지 말아야 할 것에
내가 남겨버린 소리가 일고
다시 흔하지 않은 누군가를 만나 흔하지 않은 곳에서의 별빛을 보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만났다.

 


(3)

김냄새 나는 비가 나린다.
통영에 내리는 비라고 모두 김냄새가 날까.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처럼 불그레해진

나는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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