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6회

하얀색으로 신전을 짓다

흰색은 망자를 위로하는 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다고 느낀다. 이곳 땅에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흰색과 검정색으로 애도하곤 하는데, 그것이 곧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끝을 또 다른 시작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그 시작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러한 관습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베푸는 일종의 위로와 같은 것이다.

70년을 재위한 이곳의 왕이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를 하는 사이에 전해져온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 역시도 놀랐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더욱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 땅 어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붙어 있는 국왕의 사진과 그를 찬양하는 문구를 볼 수가 있다. 수십 년이 넘게 왕을 위한 사진과 문구들이 도시와 마을 곳곳에 자리 잡아 왔는데 어느 순간 그가 죽고 그의 사진은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하다. 익숙해져 왔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작게는 왕의 사진부터, 크게는 왕의 자리까지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땅에서 살아온 나에겐 꽤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왕은 이 땅에서 상당한 의미를 아직도 지키고 있다. 정치적인 권한도 있고 물론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왕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가 내겐 더욱 생소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명을 달리한 푸미폰 국왕은 그 종교적 색채가 매우 두드러진다. 이 땅의 사람들은 푸미폰 왕을 신으로서 받들어왔다고 한다. 그것은 그동안의 모든 왕들에게 늘 해왔던 관례가 아니라, 푸미폰 왕에게만 유별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 사람들의 유별난 왕 사랑은 푸미폰 왕이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푸미폰 왕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아온 임금이었다.

푸미폰 왕의 아버지가 입헌 군주제를 수용한 이후, 여느 나라처럼 태국 역시 왕의 권한이 사그라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즉위한 푸미폰 왕은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궁궐을 벗어나 직접 그의 나라를 돌아다니고 경제 개발 계획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적 시도들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인권적 문제를 비롯하여 그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국왕이라는 존경을 받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차를 타고 길을 다니다보면, 곳곳에 걸려있는 왕의 사진 속 푸미폰 왕의 모습은 아주 수수한 옷차림인 것을 볼 수 있다. 정치적 계략이니 뭐니 말들이야 많을 수 있지만, 왕이 가져다주는 계급적 경계를 희미하게 해주는 정치적 계략이라면 무엇이든지 환영이다.

흰색으로 온통 칠한 신전에서는 이미 망자가 되어버린 왕을 위해 향을 피운다. 정오께가 넘어서니 하얀색 벽면은 햇빛을 만나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왜 이곳 사람들은 하얀색으로 신전을 지었을까.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누군가를 미리 기억해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세상을 등지고 떠날 때만큼은 그 길이 아쉽기 마련이다. 그 누가, 남아있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면 더욱 그렇다. 그 사랑과 존경 그리고 그것에 의존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길이 끝나는 지점일까 봐, 누군가는 벌써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는 앞으로의 길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흰색이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색깔의 반대편에 서있는 그림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의 색은 다시 흰색이 완성시킨다. 해는 금방 우리의 머리너머를 지나 지평선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얀색으로 지어놓은 신전이 말했다.

 

 

벌써 꽤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린,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그만 학생이었던 나는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명동 성당으로 향했다. 을지로입구에서부터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줄은 성당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처럼 예쁘게 돈을 들여놓지 않았던 성당 입구는 아스팔트로 된 둔덕에 불과했고 삭막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줄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신 신부님을 위해 왜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머니는 그 삭막한 둔덕에 줄을 서며 80년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아스팔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돌아가신 신부님은 그때 무엇을 지키기 위해 총과 몽둥이 앞에 바로 섰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사랑받으셨는지.

종교를 넘어서더라도, 그런 사랑들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가. 나 자신을 넘어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알았다는 것이. 이 땅의 왕이었던 자가 평화롭게 잠들기를.


 

노래하는 아이는 아름답다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문득 아이들 앞에 서 있다 보면 그 실감이 커져, 보고 서 있지만 말고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품에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에 든다.

어느 날, 같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클로드 선생이 노래를 가르치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노래를 별다르게 잘 해온 적이 없지만 알겠다고 했더니, 아이들 몇몇이 영어 노래 부르기 대회를 나가려고 한다고 그가 덧붙였다. 이 지역 대회에서 입상을 하면 더 큰 도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진출할 수 있다고 한다. 작년에 한 아이를 입상시켜봤지만, 뒤이은 대회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그는 아쉬워했다. 하여간 이런 대회들이 이곳의 아이들에게 어떤 길이 되어주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클로드 선생은 그 길을 아이들이 걷게 하는 것에 열심이었고, 나도 그런 그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교무실로 찾아와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이 다시금 실감나곤 했다. 아이들이 웃는 것만 봐도 그 모습에 기쁘다가도, 그 아이들이 맑은 그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니. 가끔 세상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들이 있는 것 같다. 더 연습해서 더 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 기분은 배가 된다. 가르칠 만한 것도 딱히 없었지만,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아이들을 꼭 입상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라도 괜히 더 알려주려고 하고,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아이들을 보는 선생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 수 있구나.

 

 

주말에 열린 대회에서 일이 있어 아이들을 보러가지는 못했지만, 곧 연락이 왔다. 클로드 선생에게 결과가 나오면 꼭 좀 일러달라고 부탁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한 학생 셋 모두 입상하고 다른 대회 진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소식을 듣고 기뻐,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 꼭 안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이 되고 정작 아이들을 보자, 잘했다는 몇 마디는 했지만 쑥스러워 껴안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가 먼저 눈치를 쓱 보더니, 슬쩍 나를 껴안으며 감사하다고 속삭인 뒤 달려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노래하지 않아도 아이는 아이라서 아름답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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