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9회

버스에서 펴든 책

배차 간격이 지겹도록 긴 시골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태국 북부에서 큰 도시 중 하나인 핏사놀룩에 닿을 수 있다. 매번 끊이지 않는 넓은 논과 들판, 그곳에 들어서는 엉성한 시장들만 보다가 사람이 북적이는 도시란 참 매력적인 곳으로 와 닿곤 한다.

정류장에서 한참 뙤약볕을 버텨 가며 기다리다 보니 버스가 한 대 들어섰다. 주섬주섬 보따리를 들고 차에 오르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줄을 섰다. 승무원이 곧 차에서 내려, 짐을 싣고 사람들의 수를 헤아린다. 자리에 앉고 나면 앞줄에서부터 승무원이 표를 끊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지긋지긋한 논밭을 차창 밖으로 바라다보며 또 한참을 덜컹거려야만 했다. 무언가 낯익으면서도, 이 땅을 벗어나면 다신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풍경들. 오래전 말로만 듣던 어른들이 살아온 땅 역시 이곳과 상당히 비슷했을 것 같다. 토큰을 끊고 읍내에서 도시로 넘어가던 낡은 도로, 낡은 버스, 그리고 그곳의 승무원.

삐걱거리는 의자에 기대어 차창에 대고 있던 눈을 잠깐 떼자, 나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은 건너 좌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계속 인사를 건넬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반,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아이를 버스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기에 나는 조금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아무 일면식 없는, 내게도 이방인이며 그들에게도 내가 이방인인 이 버스에 계속 등을 기댄다는 것은 꽤 외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사하며 살며시 드러나는 아이의 웃음은 흐드러진 꽃 같았다. 내가 그 아이와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느끼면서 비로소 버스를 타는 것이 이방인적인 낯섦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아이가 줄곧 무엇을 들여다보는 눈치기에, 차창을 바라보는 척 하면서 슬쩍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가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낸 다음 무릎에 펴놓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책장 너머를 힐끗 살피니 그것은 아마 수학책인 것 같았다. 도형과 숫자들이 놓인 책을 덜컹이는 차 안에서 한시도 놓치지 않고 보는 아이의 모습을 보다가, 수학이라면 기겁을 하던 지난 학창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대단한 고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의미 없는 물음들로 나열된 수학 시험지이며 문제집들이 모두 지긋지긋했고, 수학과는 동떨어져서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에만 죽어라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수학을 가르치시던 은사 한 분은 고등학교 과정에도 없는, 차라리 내가 관심 있어 할 만 한, 수학에서도 특이한 것들을 가져오셔서 내 앞에 놓곤 하셨다. 그러면 그제야 선생님이 가져온 수학책을 뒤져보던, 그리고 그 수학책을 밤새서 이틀 만에 다 읽던, 고집 중에 고집.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걷던 특이한 길목, 아무도 걸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여기저기 교육봉사를 많이 했었다. 어느 날은 한 고등학교에서 강사로 초대되어, 나와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는 학생들을 앉혀놓고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청소년 논문대회에서 연설을 부탁받아 30분간 강단에 섰을 때도 그렇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과감히 좋아하는 것,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선택해보라고 말하곤 했다. 어떻게 보면 꼬드긴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마음에 바람을 넣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이 낡고 오래된 관습들로 뒤덮여 어른이고 아이고 사는 것에 지쳐 잠드는 땅에 와서 나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토록 싫어했던 수학책을 아이가 버스에서 흔들려가며 읽는데 나는 그것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그 아이가 수학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선택을 할 겨를이 없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문제였다.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직장을 얻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다양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들이 치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적은, 아주 특별한 아이들만 버스에서 수학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 눈물이 울컥했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열심히 공부하란 말일까? 아니면 꿈을 찾아라? 꿈을 찾아서 그 꿈을 이뤄라? 꿈이 뭔데요 선생님, 이라고 물을까봐 애써 차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하나 더 견고해지는 것은, 다시 살던 땅으로 돌아가서 또 강단에 설 기회가 있더라도 나는 예전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섰다면, 사치를 부려보자고. 꿈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면, 적어도 꿈을 꿔보기는 하자고. 버스에서 만난, 그리고 교실에서 다시 만날 나의 아이를 떠올리며.

 

 

밀림 한 가운데에 사는 아이

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과 학생 가정 방문을 계획하게 되었다. 전교생의 7할이 넘는 수가 생계곤란을 겪고 있다고 전해 들었고, 조손가정이나 부모를 잃은 가정 등 아이들이 학업에 집중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미리 여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있는 이 시골에서는, 학교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넘어서 주민 생활 개선과 같은 지역 활동의 중심으로도 역할하고 있다. 그래서 계획한 가정 방문은 학생 가정 뿐 아니라 지역의 빈곤 가정도 포함시키게 되었고, 이들을 위로할 선물과 소량의 지원금도 준비해 놓았다.

차를 타고 조금만 익숙한 곳을 벗어나면 사방이 비포장도로다.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심하게 흔들리는데, 아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그런 길을 한참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이 땅에 와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보고 느낄 수 없는 곳. 내가 차를 타고 들어간 곳이야말로 진정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나무와 수풀, 온갖 벌레들이 들끓는 밀림 한 가운데에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듬성듬성 놓여있다.

 

 

여러 가정을 방문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 역시 짙은 밀림의 가운데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아이의 위태로운 숨소리. 기껏해야 예닐곱 된 아이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집 안으로까지 뻗쳐있는 나무에 비켜서고 나서야, 나뭇잎에 가려진 아이의 몸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었다. 곧 부서질 것 같은 다리와 팔. 흐르는 제 침마저도 스스로 닦지 못하고 아이는 집에 사람이 왔다고 웃던 것이다. 아이는 웃었다. 애써서 숨 쉬며 웃는 아이의 얼굴에서 나는 내가 들고 간 선물들과 돈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것들에 왜 부끄러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아이의 얼굴을 두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서 부끄러운 것이다. 아이는 사는가, 죽어 가는가.

지역 보건사가 이런저런 농담을 치면서 아이의 부모와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위태로운 아이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내렸다. 우리는 살아가는가, 아이와 함께 죽어 가는가. 위태로운 생각들로 들어찼다.

내가 평생 보지 못할 것들을 보고, 평생 하지 않을 생각들을 안고 잠에 든다. 그런 잠 속에서 내가 꾸는 꿈들은, 위태로운 아이 역시 꾸고 있는가.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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