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신라 고도 경주 샅샅이 훑기-1편/ 구혜리

부모님 댁이 이사를 마쳤습니다. 후에 나온 말로는 쓰레기처리 비용만 26만 원, 트럭으로 15톤이 나왔다고… 이사를 하기 1∼2주 전부터 옛 집을 수 없이 들락날락거렸습니다. 남한테 퍼주기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 뭐 하나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저와 할머니로서는 서로 옛날 물건들을 놓고 옥신각신했지요. 오래된 일기장, 어릴 적 사진첩,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잘한 추억들을 꺼내놓고 생각에 잠길 때면 손이 느려 터졌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중고나라에서는 우수회원이 되었습니다. 못 쓰는 가구는 버리고, 안 쓰는 것들은 나누고, 요새 초등학생들이야 어떤 수업을 하는지 모르지만 어릴 때 제가 쓰던 학교 준비물, 미술용품 등을 나눔 받고 흐뭇하게 돌아가던 8살짜리 남아의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유아동 용품, 유행이 지난 가구 같은 것은 무료 나눔을 자처했지만 게 중에는 ‘못버려 병’이 도져 값을 매겨놓고 처분하지 못한 물건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독 책에 대한 집착이 있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만화책을 즐겨 읽었는데, 만화로 읽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한국사 바로 읽기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이걸 팔아 말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고구려를 좋아했습니다. 역동적이고 강인한 고구려의 기개는 늘 밝고 당찬 모습을 갖고자 했던 제게 본받아야 할 조상의 모습 그 자체였죠. 만주로 뻗어나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를 보면서 삼국 통일을 고구려가 했어야 했는데,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신라는 어딘지 비열해보였습니다. 또 그러면서도 나약해보였지요. “당나라의 힘을 빌려 한반도의 반 토막밖에 얻어내지 못해놓고 삼국통일이라고 자축하다니, 신라 별로야!” 10살 꼬마 마음엔 그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옆 자리 짝꿍이 그러더군요. “왜? 난 좋은데. 멋지지 않아?” 나는 나와 다른 생각에 꽤 오래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10년을 훌쩍 넘어버렸네요. 그 친구는 무엇을 보고 신라가 멋있다고 생각한 걸까. 신라의 어떤 이야기가 그를 그토록 반하게 만든 걸까. 묵혀 놓았던 질문은 오래된 책에 함께 잠들어 있었고, 1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답을 찾으러 책을 들고 경주에 왔습니다.

 

 

경주, 일상에 깃든 역사적 가치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5시간에 걸려 ‘경주’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이미 해가 모두 떨어져 고속도로 차선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 신선한 밤공기 사이로 구수한 소똥냄새가 묻어났습니다. 지금이야 경운기도 있고 가축용 소가 익숙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곳 신라의 땅에서 처음 소를 농사에 이용한 것은 6세기 지증왕 때부터라고 합니다. 소에 쟁기를 매어 논밭을 갈고 이로써 더 빠르고 손쉽게 적은 수의 사람으로 많은 생산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지증왕은 노동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법으로 순장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신라 곳곳 유물로 사람 모양이나 가축의 모습을 빚은 토기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 땅에는 도처에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솟아 있습니다. 멀리 산곡이나 유적지 명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버스정류장 앞에, 초등학교 옆에 일상적인 도로가에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경주는 관광지라는 단어보다 유적지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손에 들고 간 만화 한국사의 작가 이현세 선생님은 이곳 경주에서 자랐다며, 매일 같이 보는 일상적인 역사의 흔적 속에서 자연히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따금씩 유적지를 응시하며 멈춰가는 사람들과, 옛터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 타지인, 또 그들을 위해 목을 아끼지 않고 역사적 의미를 설파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직 우리 사람들이 이토록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그들로 인해 이 경주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고 여기 사람들은 매일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며 자라고, 다시 아이들에게 전해주었겠구나 생각하니 다소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모두들 익숙히 알고 계실 겁니다. 하늘의 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이들과 지상에 내려옵니다. 그러자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간청했고, 환웅은 이들에게 쑥과 마늘만 먹으며 동굴에서 지내라고 말하죠. 이를 못 견딘 호랑이는 인간이 되는 데 실패했고, 인고 끝에 곰은 웅녀라는 이름의 여인이 되어 환웅과 아들을 갖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단군으로, 훗날 홍익인간 정신으로 고조선을 일으킵니다. 한편에선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어야 했던 전제를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부족 간 전쟁에서 있던 갈등과 괴로움을 비유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이미 고대 사회부터 선인들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과정 없이 달콤한 결과란 없다는 철학을 깔고 있지 않았나, 감탄해봅니다.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신화

그런데 고구려-백제-신라부터의 건국신화는 다소 헷갈리지 않나요? 왕을 통한 통치가 형성되면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비범한 왕의 출생으로부터 건국신화가 만들어졌어요. 아마도 비슷한 시기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중첩적인 모티브가 많아서 그럴 겁니다. 예컨대, 알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신화(卵生神話)’는 고구려의 주몽, 가야의 수로왕, 신라의 박혁거세와 탈해왕의 출생에서 공통적으로 보입니다.

 

 

“신라는 처음에 진한의 열두 소국 가운데 하나로 ‘사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에는 왕권이 확립되지 않고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섯 명의 촌장들이 각각 아들들을 데리고 모두 모였고, 섬길 왕을 찾아 나라를 세우자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번개와 같은 이상한 빛이 땅을 비췄고, 빛을 쫓아 간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흰말이 있었습니다. 흰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갔고, 말이 있던 곳에 알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알을 깨고 잘생긴 아기가 나왔고, 사람들은 알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성을 박, 이름을 혁거세로 지어 왕으로 섬겼습니다. 한편 혁거세가 태어나던 날, 사량리에 있는 우물가에서는 닭 모양을 한 용이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는 얼굴이 예뻤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를 월성의 북쪽 냇물에서 목욕시키자 닭의 부리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아이 이름을 ‘알영’이라 하였고, 왕비로 섬겼습니다.”

 

 

경주시 탑동에는 5개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오릉에는 박혁거세의 죽음과 관련된 신화가 또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가 승천한 후 큰 뱀이 쫓아와 혁거세의 유체를 다섯으로 나누었고, 이를 각각 장사지내기 위해 다섯 능으로 나누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들을 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릉’ 혹은 다섯 개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오릉’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박혁거세의 출생과 죽음이 보통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것은 왕의 신성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오릉은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와 그의 아내인 알영 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다섯 명의 무덤이라고 전해집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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