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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팠던 당직골 소년, 꿈 이루기까지...

<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김덕희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2.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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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 김덕희

그는 `가요계 독립군`이다. 철저히 홀로 뛴다. 가수 김덕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예전에 사용했던 예명 강태웅을 다시 본명 김덕희로 바꾸고 발라드 가수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 그는 앨범 제작, 프로듀서, 작사 작곡, 홍보, 매니저까지 모든 걸 혼자 다한다. 그래서 `독립군`이다.

지난 음반에 실린 `콩콩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대의 창` `사랑하나봐` 등으로도 인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함께 실린 또 하나의 노래가 있다. 바로 `당직골`이다. 이 노래엔 깊은 애환이 담겨 있다. 바로 너무나도 배고팠던 어린 시절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3살. 서울에 상경한 뒤에도 장화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처음에 가졌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음악인의 길을 가기 위해 명지전문대 작곡과 과정에 들어갔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너무나 배고픈 거리의 음악가였다. 기타 하나 달랑 매고 초콜릿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가난한 삶이었지만, 그를 견디게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음악’이었다.

그의 언더그라운드 생활은 단돈 1000원에서 시작됐다. 1000원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는 초콜릿을 구입했다. 이 초콜릿으로 길거리에 나가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며 사람들에게 되팔았다. 호응이 좋아 짭짤한 수입을 얻으며 악기구입에 사용하는 등 음악에 재투자를 했다. 이렇게 거리를 누비며 신촌, 강남 등 일대에선 김덕희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유명세를 탔다. 그의 이런 생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꿈을 이룬 지금,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TV에서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은 김덕희의 이런 삶을 독자님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어떨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연재` 제안을 했다. 그는 거부했다. 자랑도 아닌 어려웠던 시절을 글로 써서 알려서 좋을 게 뭐 있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수십차례에 걸쳐 설득을 거듭했고 결국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수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 사진=pixabay.com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의 유년 시절
 

뚝길 지나 산모퉁이
굴뚝 연기 솟는 내 고향
산마루 고갯길 미루나무
지금도 거기 서 있을까

산골짜기 다람쥐 
도토리나무 옮겨 다니고
물놀이 즐기던 어린시절
지금도 자꾸만 생각나

초가지붕 옹기종기
굴뚝 연기 솟는 내 고향
어머니 구수한 된장찌개
지금도 자꾸만 그리워

해가 지면 저녁놀
붉게 타오르는 감나무골
송아지 음메 울어주던
내 고향 당직골 그리워

<김덕희 작 `당직골` 중에서>

 

위에 쓴 것은 이전에 내가 낸 음반에 실렸던 `당직골`이란 노래의 가사이다. 소재가 된 당직골은 내 고향이다.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히 떠오르곤 하는 내 고향 당직골. 그곳에서의 기억들은 어느 전설 속의 한 순간들 마냥 가끔씩 나에게 정말 그런 시절들이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도 잘 믿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그 시절 당직골은 말 그대로 눈부셨다. 힘들고 아릿한 시절이었지만 많은 세월을 보낸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혹은 엄마 품 같은 포근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 때면 새로운 힘을 주고, 쓸쓸할 땐 친구가 되어주h, 감동이 돼주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당직골은 경기도 안성에서 버스를 타고 40여분 들어가야 나오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다.

봄이 찾아오는 3-4월이면 동네 주변은 온통 연분홍색 물감을 쏟아 높은 것 마냥 진달래꽃과 개나리꽃,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로 뒤덮였다. 그럴 때면 나는 동네 아이들과 조그마한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언덕 넘어 들로 나갔다. 냉이와 쑥 같은 봄나물을 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저녁 밥상은 다른 때와 달리 자연이 베풀어주신 화려한 만찬으로 변했다.

모내기 철인 5월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로 나갔다. 그곳에 버들잎강아지가 있었다. 그 열매는 요긴한 간식거리. 버드나무 줄기 껍질은 훌륭한 피리가 되어주었다.

여름이면 매미를 잡으러 다녔다. 매미채를 만들어 이 산 저 산을 이 잡듯이 뒤지며 보리매미, 말매미, 스릅매미, 맴염매미(용어들이 맞는 것인지는 잘모른다. 당시 우리들은 이렇게 불렀다.) 등을 잡으러 뛰어다녔다.

집에서 토끼도 키웠었는데 토끼풀을 뜯어서 주면 몇가락 되지도 안되는 수염을 쭈삣쭈삣 세워가며 맛있게 먹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산골짜기 너머엔 등청꼴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이곳은 아이들 수영장 역할을 해주던 곳이었다. 매미를 잡거나 토끼풀을 뜯다가 더우면 아이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저마다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가 물장난을 치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었다.

가을엔 봄꽃이 진 자리에 새로운 꽃들이 피어났다. 가장 흔한 건 들국화였다. 들국화 꽃으로 잠자리를 잡기도 했다. 꽃을 꺾어 잠자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빙빙 돌리면 잠자리가 꽃잎을 따먹으러 모여들었다. 그때 재빠르게 손으로 잡으면 그만이었다. 잡은 잠자리는 훈장처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다니며 다른 애들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벼가 익어가는 들녘엔 메뚜기가 있었다. 이 역시 자연이 주신 아주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아이들 중에는 잡은 메뚜기를 불에 굽거나 튀기지 않고 그냥 씹어먹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겨울에 토끼들이 먹을 양식거리를 미리 만들어두는 것도 가을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추수가 끝난 밭의 배추나 무 잎과 토끼풀, 아카시아 잎 등을 뜯어다가 말려두는 일이 그것이었다.

함박눈이 열 가구 남짓한 당직골의 초가지붕 위에 소복이 쌓이는 겨울 낮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딱지를 쳤다. 자치기도 했고 여름 시원한 수영장 역할을 했던 등청꼴은 이때면 다시 썰매장으로 변했다.

밤엔 가을 내내 해두었던 땔감들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군불 지핀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구마나 군밤을 구워먹으며 겨울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등잔기름이 다 닳아져 불이 꺼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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