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세 할머니의 집-심계순 할머니의 두 칸 집 ②

▲ 시어머니 생전 그대로인 장독대. 기우뚱 옹삭시런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고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꼭 할매 같다.

“시어마니가 껕도 큰디 속도 널롸”

남편 없는 삶에 가장 의지가 된 이는 시어머니였다.

“나는 심계순, 그 냥반은 박계순이여. 관동떡이라 글드만.”

이름이 같은 두 여자는 사이가 좋았다.

“우리 친정 어마니 아버니가 나 보내놓고 바람소리에도 내다봤다 그럽디다. 딸이 쫒겨오는개미. 열여섯 살 먹은 것이 머슬 허겄소. 바슬 매라 근디 여그서부터 매야 헌디 쩌어그서부텀 끌적끌적허고 있어도 그 꼴을 봤어라. 우리 시어마니가 나보다 스무 살 많애. 나는 시어마니랑 참 좋게 살았어. 시아버니는 나 시집 오고 기양 돌아가새불었어.”

시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생전 일도 안헌 양반이 작은각시가 몇이여. 집을 열두 채지섰다요. 우리 시어마니는 ‘작은사람’이라고 헙디다.”

시어머니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내가 시집옴서 시어마니 옷을 농지기라고 해 갖고 왔어. 명지베 짠 놈으로 빤닥빤닥헌 것이여. 시어마니가 작은사람 불러오라 글드니 ‘자네 맘에 든 놈 모냐 개리고 나 주소’그래. 근께 이놈 만차 보고 저놈 만차 보고 입어 보드니 ‘상근이어매가 요놈 입으씨요 내가 요놈 입을라요’ 근께 ‘알아서 허소’ 그래. 시어마니가 작은각시 꼴을 잘 봤어. ‘그것 조까를 꼴 못본다요’ 넘 보고 그래. 시어마니가 껕도 큰디 속도 널롸.”

 

▲ 그 문앞에 떨어진 신발의 흙을 모탠다면 산이 됐을 것이다. 정게 문앞에 잠시 쉰다.

 

통 큰 시어머니는 그 세상에 마을에서 돼지를 큰놈 잡아서 고기를 나누면 다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유재 사람들한테 다 나눠 주었다.

“다 줘불어. 놈들은 네 볼 낄여묵을 것을 다 줘불고 손을 탁탁 털어. 시어마니는 돼야지고기 같은 육보채는 잘 안 잡사. 소반찬을 잘 잡사. 나헌티 웃으멧소리로 그러새. ‘복산떡은 내가 괴기 질거워허문 꼴 못볼 것이다’ 그런 소리를 허개. 나를 ‘복산떡아’ 글케 부르새. 장에 갔다 옴서 아매다마를 갖다 드리문 오물오물 잘 잡샀어.”

동네 사람들이 다 치하를 했다.

“두 과수떡이 어쩌문 딸같이 어매같이 생전 쌈도 안허고 도랑도랑허고 사요, 모다 그랬어. 글케 좋게 살았소. 글서 내가 시어마니 옷은 시방도 입소. 좋게 살아서 암시랑 안해라.”

할매는 시방도 시어머니가 입던 빨간 엑스란 내복을 입고있다.

“시어마니만 믿고 사는디 시어마니 돌아가시고 난께 참말 맘이 안 좋습디다. 인자 나 혼차 사는구나 했소.”

시어머니는 그 난리통에 두 아들을 다 잃었다.

“두째 아들은 결혼도 안했었제. 어디 가 죽었는지도 몰라.”

아들을 잃은 박계순은 젊은 며느리를 짠해 하며 살았고, 신랑을 잃은 심계순은 시어머니가 짠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놓은 속엣말이 시방도 맘에 사무친다.

 

▲ 며느리 맞을 적 단촐하게 지은 아래채는 아들 내외가 3년 살고 이사한 후로 비어 있다. 그 곁으로 땔나무 더미. “땔나무 있을 동안 그 안에 죽어야껀디.”
▲ 토방 높은 집. 시방 예순 아홉 된 아들이 뛰내리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자리다. 허리 굽은 어매는 그 토방이 시방 높다 아니하고 그 애린 것한테 높았노라 한다.

 

“내가 질게 살문 아들 한나는 보고 죽을란가 했더니 못보고 죽을란갑다, 그럼서 울어싸십디다. 글드니 딱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 음력 5월 초열하랫날. 일흔 아홉에.”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아들을 그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아들 하나 먹이고 가르칠 생각에 일욕심 부린 것이 그리 후회스럽다.

“시어마니가 참 고상했소. 밭도 벌고 논도 벌고 열댓 마지기썩을 했제. 그런께 어서 헐라고만 했제. 해는 넘어간디 댐배라도 태고 있으문 ‘아이, 어서 허이씨요. 해 넘어 갈라그요’ 재촉을 했어. 언능 끝내놓고 낼은 품 한나나 앗이러 갈라고. 그러문 시어마니가 ‘아이 복산떡아 댐배나 한 대 태자’ 그래.”

시방도 사진을 꺼내보곤 한다.

“너머 고상 시갰소. 잡술 것도 지대로 못 잡수고. 내가 늙어본께 걸려라. 한자 일함서도 그러요. 조까 쉬먼 더 나슨 것을. 그런 말이 나와.”

복산떡은 일 무서운 줄 모르는 각시였다.

“내가 만날 정게서 조깨 떠먹고 일허러 나가는 것을 보고 ‘복산떡은 호무(호미) 차고 낫 차고 쪼끄리고 앙거서 밥묵는다’고 유재 사람이 그런 말을 헙디다.”

 

 

▲ 꺼멍 그을음이 더께더께 내려앉은 부엌. 그 흔한 플라스틱 쪼가리 하나 없다. 시어머니 박계순과 며느리 심계순 할매의 손태죽에 길이 난 오래된 부엌 살림들이 유정하다.

오래된 동무처럼 유정한 살림살이

복산떡은 평생 닭보다 먼저 일어났다. 날마다 복산떡이 일어나고 나서야 닭이 울었다. 아직 그 부지런을 못 고치고 산다.

“내가 성질이 못앙겄어라. 오르락내리락 기다니요. 온 아칙에도 부삭에 불 땠어.”

시방도 꺼멍 무쇠솥에 물 끓여서 고사리 삶고 취 삶은 것을 정게(부엌) 앞에다 널어서 말리는 중이다. 밭가상에서 앉은걸음으로 껑꺼서 모탠 것들이다.

할매의 정게는 친정아버지가 처음 집을 지어주던 때 그대로다.

“안에다 단다고 아버니가 놈의야 헌 문을 갖다 달았어.”

 

 

방으로 통하는 그 문에도, 벽에도 꺼멍 그을음이 더께더께 내려앉았다. 꺼멍무쇠솥 큰 것 하나 작은 것 하나, 작은 식초오가리, 나뭇가지로 만든 걸치기(솥 안이나 솥 가상에 걸쳐서 위에 찜양푼을 올려 밥을 찐다). 두 여자의 손태죽에 길이 난 부엌살림들은 오래된 동무처럼 유정하다. 부삭에 솥받침은 칡덩굴로 만든 것이다.

“소두방 노문 좋아라. 작년에 맨들았소. 조깐 큰 놈도 해놨어. 깔고 앙글라고.”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 사지 않고 내 몸공을 들여 자작하는 어매. 한번 내 것이 된 인연은 끝의 끝까지 지켜보려는 어매는 내복도 꿰매 입고 고무신도 꿰매 신고 치(키)도 꿰매 쓴다. 몽당빗지락마저도 둘을 보태어 몸피를 키울 궁리를 하는 어매다. 버리는 것이라곤 없으니 쓰레기통도 없는 집이다.

“시어마니 살아지실 적 쓰던 것이여.”

시어머니 생전에 놔두신 그대로 두고 쓰는 장독들은 기우뚱한 채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 시집온께 저러고 있습디다. 장독 밑에 독도 그대로여. 거그다가 세맨을 볼라준다근디 마다 그랬소. 시어마니가 헌 것이라.”

옹삭시런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고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꼭 할매 같다.

“첨에 온께 삼간에 접집으로 좋습디다.”

삼간겹집은 난리통에 꼬실라지고 그 자리에 지어올린 집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전부인 두 칸집이었다. 마루는 집을 짓고 한참 후에 놓았다. 옹이구멍이 있었는지 구멍이 난 자리를 할매는 살뜰하게도 꺼멍봉다리를 똘똘 뭉쳐 막아놓았다.

 

 

“말래 자리에다 꺼적데기를 깔고 산께 아버니가 함평서 구루마에 나무를 사서 모냐 보내고 목수를 데꼬 와서 이 놈 말래를 놔줍디다. 울 아버니가 나 땀에 참 고상허갰어. 그런디 내가 살아생전에 고맙단 말을 못해봤소.”

친정어머니는 아버지 얼굴도 못본 외손주를 그리 짠해라고 했다.

“뭐슬 감촤갖고 있다가 가문 주고 주고 그런께 우리 막내동생이 저놈새끼 디꼬오지 마라고 띠를 쓰고 그래. 그때는 지도 애렸은께.”

마루 아래로 토방은 아들 병환이가 째깐해서 저보다 두 살 더 먹은 삼촌뻘 친척이 폴딱 뛰내리는 것을 보고 따라서 뛰내리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자리다.

“울 아그가 그때 일년을 고생했소. 저 토방이 높아갖고.

허리 굽은 어매는 그 토방이 시방 높다 아니하고, 그 애린것한테 높았노라 애기한다.

마루벽에 높이 걸린 시렁에는 꺼멍봉다리가 조랑조랑 올려져 있다.

“모도 신이여. 미느리가 신을 사와라. ‘뭐덜라고 사오냐. 살라문 구수(구두)짝 말고 꺼멍고무신이나 사와라’ 내가 그래.”

신지는 않아도 그 맘이 고마워 먼지 앉을까 꺼멍봉다리에 싸매서 조랑조랑 앉혀둔 신발들이다.

마루 앞에 굵은 대막가지를 길게 달아놓아 우천에 빨래도 널고 오만 것을 걸치기 좋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들 솜씨다.

“지그 어매 핀리허라고 오문 뭐이든 손 보고 가요.”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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