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램덩크' 리뷰-2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경기의 후반전이 시작됐다

태섭의 과거와 주연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오프닝씬이 끝나고 영화는 본론으로 들어섰다. 주인공들이 속한 북산고등학교가 우승 후보인 산왕고와 겨루는 시합의 후반전이었다. 태섭이 성장한 이후의 첫 장면이니 농구의 룰이나 다른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 정도는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을 시원하게 생략했다. 이미 진행 중인 고교체육대회 마지막 경기의 한복판에서 선수들은 이미 지친 상태로 등장한다. 원작 만화의 주인공 강백호와 이번 영화의 주인공 송태섭 말고도 같은 팀에는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선수가 있다. 어리둥절한 관객을 두고 경기가 긴박하게 흘러가는 동안, 나머지 인물들의 과거도 조금씩 함께 다뤄진다.

그 탓에 원작 만화를 보지 않고 처음 관람했을 때는 모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릴라를 닮은 채치수, 빨간 스포츠머리 강백호, 키 작은 송태섭은 구분이 가는데, 정대만과 서태웅은 그저 잘생긴 캐릭터 1, 2처럼 보였다. 특히 짧게 축약한 정대만의 과거 몽타주 시퀀스는 조금도 따라가지 못했다. 만화를 본 지금은 두 사람의 서사나 상이한 경기 스타일, 장단점과 슛폼까지 알고 있어 확연히 구분이 되지만, 처음 본 관객에게는 인물의 파악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백호와 태섭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비중 자체가 적어 영화의 전반적인 감상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았다. 상대 팀, 감독, 후보 선수, 응원단 등 무수한 인물들이 나오면서도 선택과 집중이 분명했고, 각자의 개성이 빛나 혼란이 적었다. 자신만의 사정을 끌어안은 선수들이 함께 승리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것, 이들에게 농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하는 사실을 여러모로 암시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게 저라서 죄송합니다

주인공 태섭의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면, 그는 아버지와 농구 선수였던 형을 연이어 잃은 후 그늘 속에서 묵묵히 농구를 해온 인물이다. 어머니께 살아남은 아들이 자신이라 죄송하다는 편지를 쓸 정도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단 하나의 경기, 산왕전이 진행되는 동안 태섭은 드디어 성장한다. 형의 보살핌을 받던 동생에서 어머니를 위로하는 아들로, 선배들의 괴롭힘을 받던 후배가 경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변모한다. 이 모든 과정이 그가 재빨리 발을 놀려 공을 던지는 장면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며 관객들의 응원을 이끌어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 있다. 그 시작은 태섭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조각이다. 아마도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 형이 믿음직스럽게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다. 어린 태섭은 동생과 함께 그걸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형의 죽음 이후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생일이 같던 두 형제의 나이는 이제 역전이 됐다. 어느새 형보다 키가 커진 태섭은 어린 시절의 그 기억으로 들어간다. 그 시절에 머문 형과 어머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들을 위로한다. 태섭의 손목엔 형의 아대도 함께 걸려있다. 어린 태섭과 현재의 태섭이 교차해 걷는 동안 관객들은 탄식과 더불어 눈물에 젖는다. 슬픔에 잠긴 채 형의 농구 경기 비디오를 돌려보던 어머니는 이제 태섭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 경기 이후 태섭은 주장이 된다. 모두가 느리지만 천천히, 아픔에서 벗어나 성장하고 있다.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광의 시대는 지금입니다

칠흙 같던 어둠에서 점차 스포트라이트로 걸어가는 인물이 있는 반면, 전성기를 누리고 화려하게 퇴장하는 인물도 있다. 바로 원작 만화의 주인공 강백호다. 그는 소연의 마음을 사기 위해 농구를 시작했지만, 어느덧 그 누구보다 농구를 좋아하게 됐다. 팀이 지고 있는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정말 말 그대로 몸을 내던진다.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서 있기도 어려울 지경에 이른다. 당연히 선수 교체가 이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감독을 만류한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급기야 소연을 두고 인생의 라이벌로 생각했던 서태웅과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후, 전례 없던 하이파이브를 하며 길이 남은 명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화는 산왕전이 끝난 뒤 미국 NBA에 진출한 태섭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자칭 천재이자 경기에 큰 공을 세운 백호가 어떤 선수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을 보지 못하고 영화만 본 관객의 입장에서 감히 상상해 보자면, 이 경기에서의 부상이 그의 선수 생명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태섭과,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은 후 사라진 백호. 구름 같은 팬을 몰고 다니는 미남 캐릭터 대만과 태웅이 아닌 이 두 사람이 마음을 울리고 뒤흔든다. 부디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얼마나 삼켜냈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 그것도 실제 사람이 아닌 납작한 2D의 캐릭터인데도 너무나 사랑하고 응원하게 되어버렸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리한 플롯의 형식 외에도 훌륭한 지점이 넘쳐났다. 우선 선수들의 유니폼이 바람에 흩날리는 디테일을 보는 순간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인 드림웍스의 ‘슈렉’, ‘쿵푸팬더’ 시리즈로 대표되는 3D는 아니고, 일본의 스튜디오 지브리로 대표되는 2D 형식의 영화였다. 실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누가 봐도 만화 캐릭터 같은 그림체를 고수하는 방식이다. 그 탓에 예고편만 봤을 때는 극장용 영화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3D의 생동감이 없으니 애니메이션 극장판 정도로 인식되었고, 집에서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봐도 충분할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참으로 큰일 날 생각이었다.

경기 장면의 박진감과 생동감은 실제 농구 경기를 봤을 때보다 뛰어났다. 중요한 장면에서 슬로우를 걸고, 클로즈업을 하고, 드론 숏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카메라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덕분이다. 농구에 무지한 일반 관람객에게 영화의 이야기와 더불어 경기 상황을 온전히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박수가 절로 나온다. 어느새 팝콘을 움켜쥐던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졌고, 벌어진 입에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조용하던 극장은 실제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팬데믹 이후로 오랜만에 군중의 설렘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연거푸 떠올랐다.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인물의 마음이 관객에게 걸어 들어 온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3D를 택했다면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됐을지 모른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예외적으로 3D 애니메이션 기법을 택했던 <아야와 마녀>가 그러했다. 영화는 사실감과 허구성의 균형을 잃고 불쾌한 골짜기에 머물면서 오랜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 다행히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억지로 3D화하지 않고, 원작의 디자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전략을 택했다. 작화로 찬사를 받았던 원작자가 연출에 참여하며 특유의 정체성이 그대로 반영됐다. 그러니 연재 종료 이후 27년 만에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만화가 되살아난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연필 선이 하나씩 추가되어 스케치가 되고, 그 스케치가 움직이더니 색을 입고, 마침내 우리가 아는 캐릭터들의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오프닝 시퀀스가 걸작인 이유다.

이렇게 영화 안팎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지점들은 오래된 팬들에게 더욱 큰 선물로 다가왔을 테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애니메이션의 외전이나 확장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적인 영화로 탄생했다. 상대 팀인 산왕고의 정우성은 이미 완성형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직전 절을 찾아 겸손한 자세로 기도를 올린다. “제가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주세요.” 이미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콘텐츠 ‘슬램덩크’는 영화에도 용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필요한 영화적 경험을 충분히 선사함으로써 제 역할 이상을 해냈다. 인물의 마음이 영화로 확장되어 관객에게 다가온 순간, 나는 이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게 됐다. 인생의 화양연화를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진심으로 압축한 단 하나의 경기,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아직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늦더라도 꼭 보기를 추천한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