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위클리서울=박석무] 한 인간이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을 놓아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온 정성을 바쳐 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굳은 의지와 큰 용기를 지닌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사암선생연보』라는 다산의 인생을 연대별로 소상하게 기록한 다산의 연보를 읽어보면 다산이야말로 학문연구로 진리를 탐구해내겠다는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을 전혀 놓지 않고 운명하던 그날까지 온갖 노력과 정성을 바쳐 진리탐구에 생을 걸었던 사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내 나이 스무 살 때는 우주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그 이치를 완전히 정리하고 싶었다. 서른·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러한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몸에 중풍이 생겨 그런 마음이 점점 쇠잔해지고 있다. 하지만 정신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차분한 생각이 떠올라 문득 옛날의 욕심들이 다시 일어나곤 한다.”

우주의 모든 일에서 진리를 완전히 깨닫고 실현하려는 욕구, 몸에 병이 들던 때에 정신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곧바로 옛날의 진리탐구 욕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니 그의 무서운 탐구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 다산공은 처음에 거룩한 임금(정조)을 만나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을 토의하고 학문을 강론하여 먼저 그 바탕을 세우고, 중년에 상고(上古)의 성인들을 경적(經籍)에서 사숙하여 아무리 심오한 것도 연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무리 높은 것도 우러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사암선생연보 발문) 스승 같은 임금에게서 진리를 듣고, 경적을 통해 성인들이 밝힌 진리를 탐구했다는 내용입니다.

“다산공은 20년 동안 유폐되어 다산에 있으면서 열심히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여 여름 더위에도 멈추지 않고 겨울 밤에도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사암선생연보)라고 연보 편찬자 다산의 현손(玄孫:고손자) 정규영은 다산의 손자인 자신의 할아버지 (丁大林)에게 고조할아버지의 삶을 얻어듣고 속임 없이 기술해 놓았습니다. 세상에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다산은 애초에 천재였습니다. 다산 자신도 어려서는 영특했노라고 밝힌 것처럼 세상에 없는 천재였지만 그는 일생동안 쉬는 날이 없이 진리탐구를 위한 학문연구에 온갖 노력과 정성을 바쳐 그런 학문적 대업을 이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육경사서(六經四書)의 학문에 있어서, 『주역』은 다섯 번 원고를 바꾸었고 그 나머지 구경(九經)도 두세번씩 원고를 바꾸었다. 공의 탁월한 식견에 부지런하고 민첩함을 겸하며 이 큰 일을 완성했었다. 저술이 많기로는 신라·고려 이전이나 이후에 없었던 바이다.”(같은 책) 신라·고려 이전이나 이후에 그처럼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니 다산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온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미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여 대단한 체하지도 않았고, 이미 늙었다고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으니, 아! 지극한 덕행과 훌륭한 학문이 아닌가!”(같은 책)

현손 정규영은 고조할아버지 다산에 대한 사심 없는 올바른 평가를 내렸습니다. 지행(至行)·성학(盛學)이라는 네 글자로, 지칠 줄 모르던 진리탐구의 용기로 현자(賢者)에 오른 다산의 진면목을 밝혔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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