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기후위기, 기후위기,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면역이 돼버렸다고나 할까, 뭐 그러려니 싶었던 기후위기가 마침내 바싹 가까워졌다는 느낌이다. 11월이 끝나기도 전에 눈발이 비치는가 싶더니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된서리가 표창처럼 내리 꽂히고 얼음까지 얼어버렸다.

그 바람에 우리 집 마당에 나무들은 단풍도 못 들어보고 얼었다고 해야 하나 타버렸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이파리가 나뭇가지에 빽빽이 매달린 채로 비비꼬아져 갔다. 씩씩한 푸름을 자랑하는 화초에 누군가 느닷없이 펄펄 끓는 물이라도 확 끼얹어 버린 것 같았다. 나뭇잎 고유의 색깔마저 잃어버린 채 뒤틀린 그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통증을 호소하며 데굴데굴 뒹구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오기도 한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11월 서릿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나무들 중에서 일부는 발 빠르게 물이 들기도 했지만 서릿발에 금방 떨어져 버렸고, 뽕나무 계통과 목련 계열의 나무들은 단 한 점의 물도 못 들어보고 꽈배기처럼 비비꼬아져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삭바삭 말라서 바람이라도 불면 스륵스륵 소리를 낸다. 스륵스륵, 이 소리는 매우 을씨년스럽고 위협적이어서 기후학자들의 경고가 단순한 경고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 동네의 동백은 겨울을 다 보내고 새로운 봄이 시작되는 3월 즈음부터 핀다 해서 춘백이라 불려 왔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12월에 한두 송이씩 핀다 싶더니 올해는 아예 떼로 몰려서 피었다. 낯설다. 무더기로 피어 있는 12월의 동백이 너무 낯설고 섬뜩해서 기후위기, 네 음절의 단어가 다시금 섬뜩하게 떠올라 온다.

기후학자들은 지구가 현재 간빙기를 지나고 있다고 해설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리는 빙하기가 끝난 지도 십만여 년, 남극과 북극에만 남아 있는 거대한 얼음산이 지구 전체로 확산되는 새로운 빙하기가 머잖은 장래에 도래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빙하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기후학자들은 아마도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지구 온난화와 빙하기 중 어느 것이 먼저 지구를 덮칠 것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딱 떨어지는 자료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울 것인가 말이다.

내가 살아서 기후위기의 극단을 목도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마당을 오락가락 서성이며 그런 한심을 소망을 품어보고 있는 참인데 안녕하세요, 낭랑하게 상쾌한 목소리가 이중창으로 내 정신을 흔들어 깨운다.

슬쩍 봐도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돼 보이는, 그야말로 파릇파릇한 소녀라고 해야 하나 아가씨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미래의 여인네 둘이 나란하게 마당으로 들어서며 빵긋이 웃는다.

“누구?”

절차상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나는 사실 그들을 안다. 개별적으로는 모른다 해도, 어디서 나왔는지 구체적인 앎은 없다 해도, 무엇을 목적으로 내 집 마당을 들어서고 있는지 정도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해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할 즈음이면 마을에 손님들이, 불청객이라고나 해야 할 낯선 사람들이 찾아들곤 했다. 그들은 승합차를 타고 와서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워놓고 두 명씩 짝을 지어 집집을 방문한다.

 

서릿발이 꽃 같다
서릿발이 꽃 같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전년에 왔던 사람들이 또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동일한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불교 계통의 신흥종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계열의 유명한 어떤 종파 느낌이 확 들기도 하고, 오래 전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 종교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각양각색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기로 하자면 십칠팔 세 이상 서른 살 미만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고, 남성은 거의 없이 얼굴에 색조화장마저 산뜻한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쨌든 이 친구들은 나를 참 난감하게 한다. 딱 부러지게 그냥 너희들에게 속아줄 생각이 나는 전혀 없거든, 해버리면 쉽게 해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상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은근 괴로운 것이다. 연륜이라도 좀 지긋하고 세상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라면 붙잡아 앉혀놓고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토론이라도 해보자고 덤벼보겠지만, 이 파릇파릇한 친구들의 목적의식은 너무나 확고해서 오직 하나 자기들의 교주님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분인가를 선전하는 데만 열과 성을 다하니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다.

불청객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마을에 제법 있기는 했다. 삶 자체가 고독이 돼버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파릇한 청춘들의 방문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어서 오라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정감이 뚝뚝 떨어지는 언행으로 손님맞이를 각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그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이것저것 무엇이든 물어보면 가족관계는 물론이요 재산상황까지 하나도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다 털어놓아 버린다.

하나도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죄다 털어놓는 것. 그렇게 하도록 유인해내는 것. 그런 기술을 불청객들이 연마해서 활용하고 있다는 게 결국 밝혀지기는 했다. 그들의 방문 목적이 순수한 포교나 전도가 아니라 탈취 가능한 자산 일체를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각급 치안 부서와 주민자치회 차원의 계도방송을 해보기도 했지만, 불시에 찾아와서 두세 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을 하고 떠나는 ‘기술자들’을 막아낼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돈을 목적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는 게 일상인 시대가 돼버렸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마르크스의 경고와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기도 한다.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인간의 고독과 우울 그리고 피해의식이고, 그것을 전파할 때 사용하는 재료가 또한 인간의 고독과 우울 그리고 피해의식인 것이니, 마르크스는 확실히 당대를 살면서도 당대가 아닌 먼 미래를 보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서릿발에 타버린 목련잎
서릿발에 타버린 목련잎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신흥종교 연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대체로 친구가 없거나, 매사에 소극적이거나, 우울증 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춘기 소녀들을 표적으로 삼아서 네다섯 명이 동시에 집중 공략하는 방식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고 한다. 일단 대화가 성사되면 저 유명한 가스라이팅 작업이 실시되고, 이어서 은근한 공포와 협박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노예화 과정을 거친 다음 ‘영업현장’으로 내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취해 들인 돈으로 교주는 헬리콥터를 사서 교육현장을 순시하는 등의 위용을 과시하고, 공포와 협박의 포로가 돼서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제거당한 ‘전도사’들은 마치 전체주의 국가의 카드섹션이나 메스게임 현장에 동원된 ‘인민’들처럼 두 손을 높이 흔들어대며 만세, 만세를 외치는 방식의 엑스타시를 느낀다. 이 모든 에너지가 지본에서 나오고, 자본으로 수렴되는 것이니, 인간이란 정말로 불쌍한 존재인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안 가져볼 수가 없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와 돈과 탈취기술은 삼위일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실상 한 몸이었다. 인간이 문자를 만들어서 역사를 기록하기 전까지의 이를테면 원시종교 시대에 종교는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 전력을 다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지가 발달되면서 종교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고등종교와 자본주의는 출발점이 거의 같았다. 오늘날 맹위를 떨치는 자본주의는 유대교가 그 실제 모델이라는 점에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동의한다. 물론 돈으로 사업체를 일으켜서 이윤을 취하는 건강한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노골적인, 완벽한 착취가 기본 전제로 깔려 있는 체제를 말한다.

해방신학 등 고등종교의 뿌리를 엄격한 잣대로 탐구하는 학자들은 유대교가 사실상의 고리대금 창시집단이었다는 다수의 증거를 오래 전부터 제시해 왔다. 유대교 최고위층이 직접 개입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물론 남아 있지 않다. 최고위층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헌금을 내야만 하는 이유를 감동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교해서 교인들이 헌금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고한 의식을,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세뇌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돈으로 돈 놀이를 하는 전문가 집단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한다 하는 글로벌 금융전문가 대부분이 유대인으로 구성돼 있는 이유가 자동으로 설명되는 셈이다.

아무튼 헌금을 받아서 헌금을 낸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빌려준 그 돈을 다시 헌금으로 받는 게 초기 유대교의 기본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돈을 빌려줄 때는 반드시 원리금 상환 일자를 명기하고, 상환 일자를 어기면 이자가 얼마씩 오르고, 그 날짜를 못 지키면 이자에 이자가 또 붙는 방식이었으니, 오늘날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채업자들의 운영 방식과 완전히 닮은꼴이라 할 만하다.

 

3월 춘백이 12월에
3월 춘백이 12월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나사렛 사람 예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런 살인적인 만행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가 크게 잘못 됐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차마, 감히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해볼 엄두는 내지 못한 채로 당하고만 있었다.

그때 어느 날 나사렛 사람 예수가 등장해서 사채업자들을 악마 중에 악마라고 호통을 쳤고, 사람들은 아 그렇지 맞아, 하고 호응을 했으며, 유대교 지도층은 이제 예수 처단 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게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인간은 사랑, 사랑, 사랑 노래를 수도 없이 불러대는 한편 돈 냄새가 풍기는 시점에 이르면 즉각 상대를 죽여 버린다는 것, 그럴 수도 있다는 것, 그럴 수도 있게 돼 있다는 거, 그래서 종교는 마약이고, 자본주의는 인간을 도구화하는 치명적인 모순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멸망하게 돼 있다고 마르크스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자본주의를 창시한 집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런 마르크스는 예수 못지않게 극악한 훼방꾼일 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이런 주제를 끄집어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얼굴에 색조화장을 곱게 한 몸으로 내 집 마당에 들어와 있는 미래의 여인네들은 아마 그런 여유가 없을 것이다. 없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안다. 그들을 보낸 교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그냥 하나의 영업사원일 뿐이고, 영업사원들은 그날의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만 한다. 목표 달성을 못 하면 징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은, 어쩌면 금방 울어버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간절한 눈빛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당신이 앞으로 세상을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러시나요. 죽기 전에 한 번만 속아주세요 네?”

미안하다. 속아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간신히 그들을 돌려보내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참석하는 간담회 영상이 컴퓨터에 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피해 사례 수집과 대책을 당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냥 죽어버리고 싶거든요. 그런데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죽지도 못하겠어요.”

눈물이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는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 가까이 직장을 다니는 한편 밤에는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모은 돈으로 전세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집 주인이 달아나 버렸다는 거였다. 당국자들은 사기꾼이 달아나서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게 뭐냐고 묻는 중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영상이 소위 지상파 방송에서는 한 컷도 안 나온다는 점이었다. 이쯤 되면 인류의 미래가 완전히 닫혔다고 봐야지 않을까? 어쩌면 기후위기가 현실화되기도 전에 뭔가 거대한 것이 덮쳐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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