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시 읽는 일기] 육호수 - 쉴 만한 물가 /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中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다은

당신과 개울을 건너다 나는 알아버렸지. 살아서 건너야 할 개울이 이렇게 깊을 리 없다고. 그러나 당신이 앞으로, 앞으로 가자고 했으므로, 나는 앞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당신은 이곳으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당신이 험한 곳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닿지 않았다. 당신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만 향했으므로, 나는 혼자 돌아왔다. 돌아가고자 했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나를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며 당신은,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배웅했다. 배웅하고자 했으나 눈과 코와 입이 막혀 하지 못했다.

​개울을 건너 당신은 돌아왔다. “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당신이 말할 때, 나는 알아버렸지. 산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우리가 쉴 만한 물가를 떠나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가 건너편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알리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당신과 나의 사이가 깊어서 누구도 살아서 그 사이를 건너지 못할 거라고. 나는 가고 있다. 발이 닿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 두려웠다, 두렵지 않다.

 

이 시를 쓴 육호수라는 시인에 대해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거의, 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쩐지 그를 조금은 알고 있다는 기분 탓인데, 그것은 내가 몇 년 전에 사둔 그의 시집을 책상에 몇 년째 그대로 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셈해보니 그의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를 2018년에 구입하고 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두 편 읽어보고 그래 다음에 읽어보아야지,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푸른색 시집은 내 책상에서 하나의 정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두 편 읽어본 그의 시가 읽기에 별로라 읽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책이란 자고로 읽어야 할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소설가 김영하의 말대로, 사 놓고 안 읽은 책은··· 너무 많다. 나로서는 특히 시집이 그럴 때가 부지기수다. 요새 주목받은 시집이라서, 한두 편 읽어본 시가 좋아서 무심코 사놓은 이후에 잘 읽게 되지 않는다. 책을 한 권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고리타분한 성격으로서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시집에 잘 손이 가지 않는다. 그 한 편, 한 편을 집중해서 다 읽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알겠지만, 준비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마음의 준비.

아무리 시인들이 ‘한 권’ 단위를 염두하며 전체 시집을 썼다고 한들, 최근의 한국 시들은 내게 한 권이라기 보다는 여러 시들의 ‘묶음’으로 느껴진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즐기는 요량으로 읽어도 좋을 텐데 괜히 나는 책 한 권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느끼고 싶어서 용을 쓰고, 용 쓰는 것은 힘들고, 그러다보니 안 읽은 시집이 쌓여 왔다. 그중 하나의 시집인 육호수의 첫 시집은 왜인지 책상에 놓아둔 위치가 마음에 들어 몇 년째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읽지 않은 핑계가 이토록 구차하다. 무슨 굴비도 아니고, 인테리어 소품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책은 바쁜 일상에서 괜히 눈으로라도 한 술 뜨는 굴비일 수도, 색감이 아름다운 소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한 권으로 보면 때로 막막하지만, 하나의 시로 보면 갑자기 술술 읽힐 때가 있다. 바로 이 시가 그랬는데, 육호수의 두 번째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에 실려 있다는 시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았을 이 시의 첫 번째 줄을 읽고 나는 일순간 어떤 순간에 붙박인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슬픈 예감의 순간. 무엇인가를 ‘안 것’이 아니라, ‘알아버린’ 짧고 강렬한 순간에 말이다. 화자는 누군가와 개울을 건너다가 깨닫고 만다, 살아서 건널 개울이 이렇게 깊을 리가 없다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것은 현재형으로 하는 미래완료의 깨달음이다. 지금 당장 앞으로 가고 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과 당신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알아차림. 마치 꿈을 꾸는 동안에 이게 전부 꿈이라는 것을 감각하는 희소한 순간처럼. 꿈에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상상한다. 꿈에서 나는 알아버렸지, 살아 있지 않은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걸 보니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고. 이 모든 게 결국 꿈이라는 걸 감각하는 그 짧고 날카로운 순간을, 나는 이 시를 읽으며 갑자기 다시 체험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금방 꿈에서 깨어나기 마련이고, 꿈에서 만난 사람은 갑작스러 훌훌 사라져버려 지독하고 흐릿한 ‘없음’만이 남는다.

그 날카로운 순간을 현실에 적용해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에서 한 남자가 연인과의 지난 날을 회상하며, 반드시 헤어질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순간을 떠올린다. 당신과 싸우고 돌아와 나는 알아버렸지. 이토록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미래에도 함께 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현실에 적용하니 너무 가벼워지나? 친구든 연인이든, 당장은 함께하고 있지만 앞으로 함께 할 수 없을 거라는 갑작스러운 알아차림이찾아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미래를 엿보아버렸다는 직관적인 착각에 슬퍼지기도 한다.

이 순간의 예감이 갑작스러운 이유는, 상반되는 두가지 속성이 일순간에 겹쳐지는 때에 이러한 알아차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꿈과 현실이라는 속성, 삶과 죽음이라는 속성, 있음과 없음이라는 속성 말이다. “산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시의 화자가 상대방의 죽음을 일순간에 알아차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이미 완료된/완료될 미래를 예감한다. 죽은 사람을 꿈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죽은 사람이 내 앞에 있을 수는 없다고 불현듯 깨닫는 순간. 함께 하는 당신과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느끼는 예감의 순간.

상반된 두 가지가 갑자기 한순간에 붙어서, 우리에게 예감을 주는 순간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에 ‘알아버리는 것’. 미래는 어디 멀리 있다가 천천히 찾아오지만은 않는다. 꿈 바깥의 현실이 어디 멀리 있다가 천천히 꿈을 깨우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보여주는 미래의 기척을 느끼는 오늘, 나는 앞으로를 느껴서 두렵고, 앞으로를 느꼈기에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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