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 (2)

 

반쯤 잘려진 꼬리를 질질 끌고 다닐 때의 어린 고양이는 뭐라고 딱히 적절한 표현을 찾아낼 수가 없을 정도로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참혹하다거나 끔찍하다는 느낌은 차라리 없었다. 피를 철철 흘리거나 뚝뚝 흘리고 다녔다면 아마 참혹하다거나 끔찍하다는 느낌에 진저리를 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녀석을 발견했을 때는 꼬리가 반쯤 잘려진 지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그 녀석 꼬리가 참 이상하게도 생겼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어린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그런 혼잣말이나 하고 있었다. 사라졌던 고양이가 다시 나타나서 거기 있으니까 시선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간 것일 뿐 적극적인 관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양이라는 명칭의 동물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대충 건성으로 그저 보고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옆의 그녀는 달랐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작고 어린 것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투사하는 그녀는 어린 고양이의 상태가 막연히 이상한 게 아니라 심각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댈룽거리는 꼬리를 끌고 찾아왔을 때

 

“아니에요. 저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잘려진 거예요.”
“잘려져? 잘려지다니?”

사람은 가끔 뭔가를 보면서도 못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날의 내가 꼭 그런 꼴이었다. 어린 고양이의 꼬리가 댕겅 잘려질 수도 있다는 상상은 감히, 차마 해볼 수가 없었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꼬리가 잘려진 고양이를 보면서도 꼬리가 잘려졌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한 채로 그저 꼬리가 이상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잘려졌다고 대뜸 말하는 그녀가 이상하고 심지어는 호들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 정말이네. 잘려졌네? 저게 뭐야, 저게!”

내가 어리벙벙해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나름의 어떤 확신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의 꼬리가 잘려진 것처럼, 잘려지고 있는 것처럼 절박하게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얼굴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줄줄 쏟아낼 것처럼 심하게 찌그러진 채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심각한 표정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어린 고양이의 꼬리가 정말로 반쯤 잘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어쩌면 즉각 알았다기보다는 뭐랄까, 잘려진 상태일 수도 있다는 직감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옳을 터이었다.

어쨌든 고양이의 꼬리는 반쯤 잘려져 있었다. 피가 마르면서 털과 뼈와 살이 엉켜져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꼬리가 반쯤 잘려진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잘려졌다고 보는 게 옳았다.

 

▲ 과자를 먹을까 말까~

 

뼈와 살은 모두 잘려지고, 가죽만 그것도 한쪽 것만 남아서 댈룽거리며 그것이 원래 고양이의 꼬리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꼬리가 잘려진 직후에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제는 털과 함께 말라붙어서 마른 나뭇가지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뭔가를 어떻게든 해볼 엄두는 감히 내불 수가 없었다. 사람의 손이 닿는 순간 고양이는 극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 어린 녀석은 우리의 손길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먹을 것을 내밀면 주저주저 하다가 슬쩍 다가와서 날름 받아먹기는 하지만 터럭 한 올도 만지는 것은 싫다는 듯이 손을 내밀면 온 몸을 움츠리거나 슬쩍 피하면서 가녀럽게 날카로운 소리로 ‘응애’하고 들리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어서, 우리는 감히 그 꼬리를 만져보거나 살펴보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녀석이 완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적개심 같은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가만히 내밀면 고개를 슬쩍, 그야말로 슬쩍 몸을 움츠리거나 날렵하게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서는 방식으로 피해버리고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손을 조심스럽게 가만히 내밀지 않고 거칠게 확, 또는 덥석 하고 녀석을 잡으려고 했다면 녀석도 어쩌지 못하고 잡혀주었을지는 모른다. 설령 잡혀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가항력적으로 그냥 잡히고 말았을 터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우리가 거친 행동을 보이면 그 순간 녀석은 자신의 가련함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낙엽처럼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보다 정직하게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자신이 심적으로 뭔가를 포기하고 있었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우리는 또한 알고 있었다. 아물어가는 생채기의 부스럼딱지를 건들면 아프고 피가 난다는 것을.

 

▲ 밤에도 여긴 내 집이야 했건만...

 

만약에 그녀와 나 두 사람 중에 누구든 의사나 혹은 간호사의 경험이 있었다면, 아니 뭐 딱히 그런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 준할 정도의 단호함이 있었다면 거죽만 겨우 붙어서 댈룽거리는 꼬리를 그냥 싹 잘라내 버리는 것이 어린 고양이의 생명 유지에 훨씬 이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었고, 이론적으로는 꼬리를 아예 잘라내 버리는 게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행동으로 보여줄 용기는 내지 못한 채로 이런저런 핑계거리나 열심히 찾아내고 있었다.

“세상에, 누가 이런 짓을, 응? 누가.”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이 함부로 만지는 게 더 안 좋을 수가 있어. 자연치유가 제일이야.”
“자연치유, 그래요, 함부로 손대지 말고 그냥 둬요, 그냥.”

비겁했다고 할까. 아니면 용기가 너무 없었다고? 아니 어쩌면 나무가 어떤 일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프로폴리스를 방출해서 치료한다는 서푼짜리 상식에 기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되었건 그녀와 나는 그 점에 관한 한 완벽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날이 잘 선 칼이나 가위를 들고 와서 눈 딱 감고 꼬리를 싹둑 잘라버리자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은 의견을 교환하는 것조차 몹쓸 짓이라는 듯이 우리는 그저 자연치유, 자연치유, 자연치유만 노래를 부르듯이 되뇌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죽만 살짝 남겨진 채로 잘려진 흉물스런 꼬리가 스스로 떨어져 나가주는 그 날을. 

 

▲ 꼬리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타박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되는 그 날, 우리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된 그 날, 그 날도 어린 고양이 녀석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 앞에 와서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즉각 멸치가 담겨진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녀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는 방식으로 뒤따라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보았다. 녀석의 엉덩이 쪽이 말끔하게 정리돼 있는 모습을.

오, 그 순간은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어머, 어머, 소리를 잇달아 토해내며 어린 고양이의 엉덩이 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무슨 굉장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헛기침을 잇달아 토해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증유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만약에 어린 고양이가 반쯤 잘려진 채로 방치된 꼬리 때문에 무엇인가 불상사를 겪는다면, 우리는 불상사 방조범이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도무지 떳떳할 수가 없는 입장이 돼버리는 것이었다. 명색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는 사람인데, 사람씩이나 돼서 아무 짓도 안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죄인가 말이다.

그런데 꼬리가 완전히 없어진 어린 고양이는 그 모양새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사람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꼬리뼈를 연상케도 하는 그 모습은 뭐랄까, 어린 고양이도 이제 곧 사람처럼 만물의 영장 급으로 등급이 상향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목에 달린 방울만 떼어내 버린다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종이 하나 탄생할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불청객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어린 녀석

 

고양이 목의 방울, 정말이지 그것은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얄망궂게만 느껴졌다.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달아준 사람의 입장에서야 물론 무엇인가 장식품 구실도 하기는 하겠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글쎄, 어떨까. 사람이 목걸이나 귀고리를 했을 때와 같은 그런 느낌일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좋아서 스스로 그것을 착용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가 않으니까. 무엇보다 사람은 목걸이든 귀고리든 스스로 판단해서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만 그것을 착용하지만 고양이는 필요니 뭐니 그런 고려사항 없이 무조건 밤낮으로 달고 있어야만 한다.

사람인 우리가 고양이의 입장이 돼서 무엇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글쎄, 발상은 제법 그럴싸해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양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구실 아래 방울을 떼어내 버려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린 고양이는 일단 주인이 따로 있는 몸이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몸을 주인도 아닌 자가 함부로 건드린다면 그것이 곧 형법상의 어떤 조항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임의로 방울을 떼어내 버린 뒤에 고양이의 주인인 교회 목사님이 우리를 재물손괴 같은 죄목으로 고소를 해버린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대로 당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안타까운 것이었다.

우리의 안타까움이야 어떻건 어린 고양이는 이제 우리 집을 자기 집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자기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무 때나 들어와서 놀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기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토방에 앉아서 먹을 먹다가도 지나가던 고양이가 얼굴을 내밀고 기웃거릴라치면 눈에 묘한 광채를 뿜어내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경고를 보내는데 그 모양이 참 발칙하면서도 대범하고 귀여워서 우리는 그만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 어린 녀석의 경고에 움츠리는 불청객

 

어린 녀석이 저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고양이를 향해 여기는 내 집이니까 넘보지 마 인마, 하는 투의 그런 대범하게도 발칙한 경고음을 낼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겠는가. 두 말이 필요 없이 사랑일 것이었다. 우리가 저를 사랑해 주니까, 그 사랑을 에너지로 어린 녀석은 호랑이도 무섭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녀석이 그렇게 자신감 있는 행동을 보일 때면 그녀는 녀석의 목에 달린 방울을 더욱더 못 견뎌 했다.

“아이 참, 떼어내 버리고 싶은데, 어쩌지, 어쩌지?”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녀의 그런 혼잣말은 노심초사가 아니었다. 안절부절도 아니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꼬리가 완전히 없어지던 날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다. 다만 고양이가 아직은 남의 소유라서 선뜻 결행을 못하고 적절한 시기를 혼자 속으로 저울질하는 한편 자신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가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른바 회심의 미소라는 것을 얼굴에 가득 담고서는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그리고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피식, 피식, 혼자 웃어대는데 그 모습은 마치 봉기의 날을 정해놓고 있는 의적이나 혁명가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어느 하루 어린 고양이의 목에서 방울은 마침내 사라졌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녀의 소행임이 분명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로 고양이 방울이 없어졌네? 하고 있었고, 그녀는 봉기에 성공한 혁명가나 의적처럼 느긋하게 살풋한 미소나 지어보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웃은 죄라고 했던가. 그녀와 내가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는 등의 비밀을 공유하며 기꺼워한 대가는 다음 날 즉각 나타났다. 목에 방울이 없어진 어린 고양이가 자기 주인으로부터 무슨 일을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더 이상 우리를 찾아주지 않았다.

 

▲ 우리는 이제 이 녀석과 새로운 친교를 맺어야 한다.

 

“영역 싸움에서 져버렸나?”

그녀는 그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린 녀석의 주인인 목사님이 고양이를 더 이상 방목하지 않는 쪽으로 정책변경을 시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번에는 내 생각이 옳았다. 그녀가 졌다. 일주일쯤 지난 뒤에 어린 고양이는 목에 새로운 방울을 달고 나타났다. 마치 ‘제 운명이 이렇게 되었어요’하고 보고라도 하는 듯이, 어린 녀석은 그렇게 딱 한 차례, 그리고 한 번 더, 그렇게 두 번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쯤 지난 뒤부터 다른 고양이가 우리 집 마당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방울이 없어진 어린 고양이가 주인 행세를 하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우리는 그 새로운 녀석과 새로운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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