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코스모스 꽃이 흔들렸다. 파랑, 하양, 빨강의 총천연색 코스모스 꽃들 사이에선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온통 꽃들만이 지천이었을 뿐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었다. 준오는 그 안에 파묻혀 있다. 준오가 꽃이었고 꽃이 준오였다.

그리고 거기 또 다른 꽃이 한 송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하얀색 블라우스는 멜빵 달린 파란색 치마 속에서 살포시 나풀거렸다. 어깨 위까지 짧게 친 머리엔 하얀색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 꼽혀 있다. 남순이다. 그녀는 혼자서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코스모스 꽃의 이파리를 따는 모양이었다.

준오는 그녀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바람만이 코스모스의 가녀린 몸을 잔잔히 어루고 있었을 뿐. 금새 남순이 지척에 와 닿았다. 남순은 등을 돌린 채였다. 준오의 코에 남순의 치마가 느껴졌다. 향긋한 코스모스 향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준오는 슬그머니 치마 끝으로 손을 옮겼다. 약간은 까칠한 천이 손끝의 떨림을 감지했는지 소요를 일으켰다. 준오는 고개를 들어 남순의 머리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치마 끝을 살그머니 잡은 준오의 조막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하얀 허벅지의 살결은 하얀 코스모스의 그것보다도 더 눈이 부셨다. 준오는 진짜로 눈이 부시기라도 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치마가 차츰 더 올라갈수록 손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실핏줄. 이다지도 투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준오는 순간 의아함까지 느꼈다. 남순의 피부가 준오나 다른 아이들에 비해 희다는 건 알고 있던 바였지만 그것도 햇볕에 드러난 부분이었고,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있던 그 속내에 대해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꽤 짙어 가는 잔털들이 뱀의 비늘같이 얇게 엇갈린 그물 모양의 한가운데에서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잔잔히 물결치는 코스모스, 치마를 잡은 준오의 손도, 훔쳐지는 남순의 치마도 모두 다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제 막 무르익어 가는 그 잔털들만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준오는 고개를 돌리고 소리 죽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준오의 입김이 남순의 그것들에 어떤 미동이라도 전해줄까 염려한 탓이었다. 의지와 다르게 한숨소리는 귀청을 때리는 천둥소리 마냥 크게 울렸다. 준오는 흠칫 놀라 다시 위로 시선을 올렸지만 남순은 여전했다.

준오의 은밀한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조심스럽게 올라가던 치마 결이 점차 감싸고 있던 것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거기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주 비밀스러운 두 개의 언덕이 나타났다. 아담과 이브가 놀던 무소유의 동산과 같은 그 언덕은 작지만 적당히 솟아올라 아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를 오목하게 가르고 있는 계곡에선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앙증맞은 하얀 색의 조그만 천으로 된 방패만이 수호신이었을 뿐 그 동산엔 어떤 걸림돌이나 장애물도 없었고 울타리도 처져 있지 않았다.

조그만, 아주 조그만 놈이 아래로부터 조금씩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걸 느끼며 준오는 터져 나오는 가쁜 숨을 참느라 용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두개의 언덕이 사라졌다. 계곡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전혀 다른 장면이 마치 오버랩 되는 것처럼 들어앉았고, 준오는 그와 동시에 그만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범은 다름 아닌 그 동산의 주인 남순의 짧은 행동과 말이었다. 준오는 무슨 말인가를 들을 여유가 없었는데 어느새 남순은 몸을 180도로 돌려 준오를 향하고 있었다.

넘어진 채로 혼비백산해 자세를 추스를 생각도 못하고 있는 준오에게 남순이 싱긋 미소지으며 다시 얘기했다.

"보고 싶어?"

"……"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준오였다. 그저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남순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보고 싶냐고?"

"……"

"병∼신"

맞다. 지금의 그는 병신이었다.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준오는 꽤나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로 통했다. 학교 대표로 도내에서 치러지는 시험대회에 나가기도 했고 거기서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 자체가 경사다 하여 채근하는 동네사람들에게 어머니가 막걸리 몇동이를 선뜻 내놓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 준오가 똑똑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그 준오가 이처럼 병신일 줄이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용기를 내보려 했지만 막힌 입과 얼어붙은 사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산의 주인은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준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파격을 이어갔다. 치마가 다시 올려졌다. 이번엔 남순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였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던 치마의 무게는 마치 깃털 마냥 주인의 명령에 아주 순순했다.

어리숭한 방패막이 다시 나타났다. 준오의 시선은 눈앞에 있던 먹이를 잃어버린 개꼴이 됐다. 종착지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을 뿐.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였다. 남순이 준오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선 것이다. 이제 준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한곳에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천으로 된 방패가 함지박 만하게 준오의 눈을 채웠다. 남순은 자신의 얼굴을 준오가 볼 수 없을 정도로 밀착해왔다. 아직은 약간의 거리가 있었음에도 준오는 그 방패가 코앞에 있다고 느껴야 했다. 동산에 있는 향긋한 사과나무 냄새가 코스모스 향기 끝에 묻어 나왔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잡은 준오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 남김없이 공개돼버린 바로 코앞의 그것에 열중해 들어가고 있었다. 둔덕. 그것은 아까 보았던 동산보다는 작았지만 훨씬 더 신비로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살포시 흔들리는 하얗고 결코 완벽하지 못한 천 조각은 그 둔덕을 채 다 덮지 못하고 있었다. 둔덕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졌고 천 조각도 약간의 주름을 실은 채 그에 철저히 동조했다.

빠알갛게 익은 향긋한 사과 냄새는 그 사이 비릿한, 준오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비릿한 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아래로부터 꾸물거리며 올라왔던 뜨거운 열기는, 채 분위기에 적응을 못했음인지 그새 수그러든 상태였다. 대신 호기심이 준오의 오감을, 아니 육감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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